떨림 : 감성의 노화를 더디게 하는 것
어디에도 익숙해지지 않으려는 몸부림
한 그릇의 죽을 만들어내기 위해 쉼 없이 젓는다. 일정한 재료를 준비한 후에는 끓는 불에 젓는 일이 전부다. 죽은 무수한 젓기로 만들어진다. 밥과 야채가 잘 풀어지게 하기 위해 젓지만 눌어붙지 않게 하기 위해 젓는다. 다른 음식들이 재료를 준비하기 전이 분주하지만 죽은 재료를 준비하고 나서가 더 손이 많이 간다. 그래서 정성이 남다른 음식이고 아픈 이들을 위한 기도의 음식인지도 모른다. 감정 중에서 떨림이 그러하지 않을까.
떨리는 감정은 상황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거나 밖으로 공격하는 감정들과는 달리 스스로 움켜쥐고 감내하는 소심한 감정 같다. 어쩌면 소녀 같은 수줍음이 담겨있어 어서 털어내려고 애써 뻔뻔해지는 노력을 하기도 한다. 그것이 어른스러움의 증거인양 떨림은 설익고 미성숙한 감정상태로 치부되기 일쑤다. 떨림의 속내를 잘 들여다본다면 떨림의 가치와 활용이 부각될 것이다. 결코 떨림은 성숙됨의 바로미터도 아니며 어린것도 아니다.
다양한 떨림이 있지만 여기서는 설렘에 가까운 감정만을 이야기하련다. 이런 경우 떨릴 수 있다는 것도 능력이 될 수 있는데 아무나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술관에서 어떤 작품을 보고 떨림이 밀려왔다면 놀라운 것이다. 작가와의 소통이 작품 하나를 통해 작동했다는 것인데 그것은 언어가 다른 이와의 통역 없는 소통과 다르지 않다. 사소하게 어떤 만남을 앞두고 떨린다면 상대를 예전의 뻔한 이가 아닌 새로운 이로 창조한 것이다.
떨리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 나약하게 감정이 작동하는 것으로 보이나 결코 그렇지 않다. 사물이나 대상에 대한 적극적인 관여, 관심, 관대, 관측 등이 복합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면 생길 수 없다. 앞서 죽을 만들 때와 같이 익숙한 사물이 되거나 흔한 대상이 되어 내 일상이라는 냄비 바닥에 눌어붙어 아름답지 않게 존재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어떠한 새로움이나 가능성도 기대할 수 없기에 떨리는 것은 민망한 감정이 되고 만다.
떨림은 세상을 동일한 순간과 익숙한 관계가 없다고 보는 마음의 상태다. 설령 반복되는 현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기존의 상태와 차별시 하거나 익숙해지지 않으려는 몸짓의 반응이다. 그래서 떨림은 창의적이려는 시도가 되고 예술적인 삶의 기초 체력이 된다. 떨리지 않고 만들어낸 인간의 창조물이 있을까. 떨리지 않고 떠난 여행이 있을까. 떨리지 않고 내 마음을 온전하게 전한 이야기들이 얼마나 있을까. 잘 떨 수 있다면 천재다.
나의 초라한 능력은 떨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다. 굳이 참으려고도 막으려고도 아닌 척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것이 어른스러움의 기준이라면 여전히 소년으로 남으련다. 감성을 더디게 노화시키고 감정에 솔직해지고 사물과의 대화가 가능해지고 가까운 보통 이들에 대한 추앙이 가능해지는 떨림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나약한 떨림의 사용으로 나도 모르게 상처받고 후회하고 외면당한다 하더라도 떨림의 힘을 믿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