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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Mar 26. 2022

당신은 지금 시낭송이 필요하다 20회

방향을 알고 날아가는 새처럼

20



노인은 붕대를 풀었다. 다치면 낫는 것보다 무뎌지는 것이 더 빠른 나이다. 발목 주위에 검버섯이 유독 모여 있어서 손을 뻗어 부벼본다. 하루하루 지난 기억들이 이렇게 일상이라는 피부에 검푸르게 듬성듬성 피어 오는 것 같았다. 감추고 가리는 게 능사가 아니다. 소년을 만나기로 한 시간이 가까워지자 걸음을 정상으로 돌려 보려고 방안을 천천히 나와 부엌으로 갔다. 가벼운 시장기를 달래려고 작은 냄비 하나를 꺼내 수프를 끓이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도 여러 가지 생각들이 밀려오지만 끝에는 시낭송에 대한 생각으로 달려가 있다. 노인은 그에 관련해 경험에서 나온 많은 결론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여전히 새로운 질문들이 떠올랐다. 기존의 질문들이 틀려서가 아니었다. 노인에게 질문은 끓는 수프가 냄비에 눌어붙지 못하게 쉼 없이 저어주는 것과 같다. 항상 질문 뒤에 답이 따라 오진 않았다. 길을 걷다 문득 떠올라 돌아보니 과정이 질문인 경우도 있었다. 때로는 질문이 답이 되기도 하고 답이 질문 그 자체 이기도 했다. 소년은 노인이 식탁을 훔치고 분재에 스프레이를 뿌리고 나자 도착했다.   


소년의 표정은 지난 번때보다 가벼운 옷차림만큼 캐주얼하다. 오는 길이 익숙하니 인사도 명랑하다. 지난주 보이지 않았던 벽들의 사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우와, 정말 젊으셨네요.

사진 속 노인의 모습은 청년인 듯했다. 스무 명이 족히 넘는 단체사진임에도 눈에 띌 정도로 지금과 다르지 않아 소년은 금방 알아차렸다. 가운데 서 있는 것으로 보아 행사의 주인공 같아 보였다.

-자네, 차 좋아하나? 내가 즐겨 마시는 차인데, 마셔보게.

 첼로 연주를 처음으로 낭송 공연에 시도해 보았네. 친한 친구가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을 직접 관객 앞에서 연주하고 나는 옆에서 시를 낭송했지. 그때엔 철학에 심취해 있던 때라 낭송으로 고른 시들도 무겁고 어려웠지. 겉멋이 많이 들었던 것 같아. 그래도 쇼펜하우어는 내게 결정적 영감을 줬네.

-염세주의 철학자가요?

-하하. 자네도 알고 있구먼. 허나 쇼펜하우어가 말한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는 시낭송을 처음 만나 고민하던 내게 충격적인 메시지였네. 지금 보이는 세상이라는 것이 결코 객관적인 것이 아닌 나의 의지에 따라 형성된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자네는 시낭송을 할 때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저는 이미지를 최대한 분명하게 그려 전달하려고 합니다. 제가 낭송하는 것은 활자이지만 감상하는 관객들에겐 하나의 그림처럼 전달하고 싶거든요. 

-그렇지, 낭송에 있어서 의미 전달만큼 이미지 전달은 중요하지. 나도 그때엔 이미지에 집중하고 연결해 보여주는 것에 집중했었다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여기서 더 나아가라고 다그치는 것 같더군. 예를 들어,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낭송한다고 해보세. 진달래꽃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상상하며 한다면 우리는 금세 활자에 매몰되고 말지. 그러나 진달래꽃에 낭송자의 주관적 의지를 담아 이미지를 떠올려 본다면 어떻겠나?

-그럼, 자기의 경험이나 기억들이 들어갈 것 같아요.

-그렇지. 관념적으로 이별을 말하지 않게 되네.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가져오지 않으면 말할 것이 없게 되고 말지. 앞에서 말한 의지라는 것이 능동적이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어진다네. 

-그런데 선생님, 그것이 왜 중요한가요?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네는 어떤 낭송이 불편한가?

-지나치게 작위적이거나 어떤 조를 가지고 신파적일 때 듣기가 거북했어요.

-바로 그걸세. 자신의 이야기가 빠져 있으니 음률을 가진 시가 개연성 없는 리듬으로 발화된 탓이네.

 방향 없이 바람에 날리는 새털처럼 말일세. 좋은 낭송은 어디로 날아갈지를 알고 날아가는 새의 움직임 같아야 하네.

소년은 노인의 힘 있는 말에서 나온 단어들이 생소했지만 미지근해진 차를 입에 대자 단맛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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