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아주 가끔 브런치를 열자마자 쉽게 쓰이는 날이 있지만 대체로 꿀 바른 손가락이 되는 날들이 대부분이다. 오늘처럼. 하아 쓸 것이 없다. 쓸 것이 없으니 쓸 말이 없고 쓸 글이 없다. 모니터의 커서는 유독 독촉하듯 깜빡임이 더 빨라지고 도드라진다. 혼자서도 커서가 글자를 찍으며 달려가면 좋으련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쓸 것이 없다고 한 말은 취소다. 솔직히 쓸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쓰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이다. 내키지 않는 마음이 무수한 쓸 것들의 앞 길을 가로막는다. 마음이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이지 결코 쓸 것이 없지는 않다. 쓸 것을 찾던 그 마음을 접고 쓰고 싶지 않은 그 마음을 돌려놓으려고 다른 마음을 잡아본다. 마음들은 내 것이면서 내 것이 아닌 것 같다. 내 마음은 남보다 내가 더 모른 채 이러고 있다. 가지고 있는 자는 그 가진 것의 본질과 특성을 그 자체보다 모른다. 자동차를 곁에 두고 있으면서 구입할 때 받은 사용설명서를 잃어버린 것처럼. 그것이 없어도 자동차를 모는 것이 어렵지 않으나 자동차의 세세하고 소소한 기능들을 충분히 알고 있지는 못하다. 그래서 그 수명만큼 다루지 못하고 폐기할 수밖에 없다. 마음도 처음 가진 날 사용설명서를 받은 적이 있었던가. 기억이 가물하다. 마음은 마음 가는 대로 사용하는 것이라 바로 설명서를 분리수거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마음은 시간이 갈수록 미움으로 자꾸 변형되거나 찌그러진다. 마음은 마음끼리 마을을 이루다가 이내 불가능함을 깨닫고 다시 홀로 버텨보기로 다짐을 한다. 글쓰기는 이래서 마음을 다루는 일이다. 내가 글이 써지지 않는다면 쓸 것이 없다고 할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있다고 똑바로 말해야 할 것이다. 내가 글이 써지지 않는다면 시간이 없다고 할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요동치는 마음의 파도를 가만히 잠잠해지길 기다리겠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글쓰기는 연필깎이로부터 시작되어야 옳다. 연필을 깎는 것은 연필 중앙의 흑연을 뾰족하게 연필을 감싼 나무밖으로 드러내게 하는 작업에 한정된 것만은 아니다. 흑심으로 다가갈수록 내 마음을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하게 다잡는 시간을 가진다. 그래서 글을 쓰기 전에 벼루에 먹을 가는 것과 같은 연필을 칼로 깎는 것은 글쓰기 전의 마음 조율과 다름 아닌 것이다.
II Euthymia
그리스어로 마음의 평정.
자기가 가는 길에 대한 인식이며 그 길에 끼어드는 모든 방해물들을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거기에만 집중하는 상태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