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때때로 글쓰기가 마려워 봤으면
글쓰기도 하나의 배설이라고 거칠게 말할 수 있다면 자주 마려워야 한다.
적어도 작가라면! (그래서 스스로 작가보다는 낮게 얕잡아 칭하고자 글 쓰는 작자라고 부른다!)
내 안의 이야기들이, 혹은 말들이, 아니 낱말의 조각들이 밖으로 나오려고 글쓰기의 항문인 열 개의 손가락 끝들이 춤을 춰야 할 텐데.
자주 글쓰기 변비에 걸려 있다.
중증이다.
심각하다.
유산균으로 순환을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글쓰기에 있어서 유산균은 경험이다.
직접적으로 경험하거나 간접적으로 경험해야 글쓰기 변비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행이나 독서로 솔루션은 분명해진다.
여행을 하면서 독서를 하는 것은 막힌 글쓰기에 특효 처방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글을 쓰는 이들은 여행을 갈 때 가방에 책을 노잣돈보다 우선으로 챙기나 보다.
마렵다는 욕망에 앞서 마르다는 충동이 전제되어야 한다.
물의 섭취와 수분의 배출이 어쩌면 이렇게 비슷하게 생겼을까.
그것은 몸의 순환이 글쓰기의 그것과 닮은 탓일 게다.
글을 쓰기 위해서 충분한 경험과 자극의 수집활동.
여러 다채로운 외부의 요소들이 내 안에서 부딪히고 싸우고 타협하다가 곰삭은 후 쏟아져 나오는 문장들.
경험이 말랐던 나에서 글이 마려운 나로 변모한다.
그 사이에 얼마나 아름다운 변화가 일어나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처음에는 타인을 흉내 내는 형태였다가
차차 나다운 문장으로 만들어가는 그 숭고하고 거룩한 글쓰기여!
정말 시를 좋아하는 이들의 축제일까.
그들만의 리그나 카르텔을 형성하기 위한 고상한 문화 난장일까.
그래도 순수한 지원자가 있다면 그대에게만 전하는 메시지다.
시낭송은 경쟁으로 우열을 가릴 수 없어야 정상이다. (고도의 선별능력을 지닌 심사위원을 아직 만나지 못했기에)
불가피하게 꼭 해야 한다면 기술을 예술이 끌어안고 그것을 집어 삼퀸 낭송자들의 고백이나 선언의 향연이어야 한다.
예술의 관점이라면 개인이 얼마나 그 시를 자신의 내면에서 확장시켜 청자로 하여금 이미지와 이야기를 동시에 촉발하느냐를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순간은 환희이며 섬광이고 소통의 충돌이 이뤄지는 찰나이거나 영원의 시간이다.
시를 매개로 낭송자와 청자는 무수한 무언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또 다른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들어야 한다.
시낭송은 목소리를 뽐내는 행위가 아니며 시를 암송하는 능력을 선보이는 것이 아니며 억지 감정을 쏟아내 신파를 던지는 자기만족의 놀이가 아니다.
https://youtube.com/watch?v=Vzij-b5V3uc&feature=shares
별이 진다네_조병석(여행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