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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Aug 29. 2023

도치의 고슴

0443

가방을 볼 때마다 떠나고 싶다.

꼭 여행용 가방이 아니어도 그러하다.

여행을 할 때에도 가방에게 가장 먼저 눈길을 준다.

떠날 때에는 말없이 가방을 열고 무언가를 채운다.

비우기 위해 떠나는데 준비는 채움이라니 아이러니다.

가방의 구석구석 크고 작은 주머니들은 작은 방이 된다.

비밀의 방!

방마다 제각각의 지령을 던지고 암호로 채운다.

떠난 곳에서 열어볼 것이다.

이곳의 공기와 저곳의 공기가 만나야 그제야 방은 입을 벌린다.

여행은 일상의 공기를
낯선 곳에 퍼 나르는 일


현실의 공기를 폐 깊숙이 들어마신다.

삶의 규칙은 주고받는 것으로부터 설정된다.

호흡이 없다면 여행의 개념과 형식이 지금과 사뭇 달랐을 것이다.

그래서 호흡은 내쉰 후에 들이마시는 순이 옳다.

여행도 떠난 후에 나그네가 되는 것이 아닌 나그네가 된 후에야 떠나는 것이다.

이미 마음이 들뜨는 것도 떠나서가 아니라 나그네로 변신을 먼저 상상하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면서도 알아듣는 말들이 우리 주변에는 얼마나 많은가.

"문 닫고 나가!"라고 말한다고 어느 누가 문을 먼저 닫고 머리를 문에 처박지는 않는다.

고스란히 들으면서 알아서 재조합을 한다.


국어나 한문에서는 뒤집어 말하는 것을 강조의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호흡'에서는 뱉어내는 '호기'의 방식이 노래를 만들고 낭송을 만들고 달리기를 만들고 헤엄치기를 만든다.

'여행'에서는 나그네의 애티튜드가 여행의 방향과 의미와 목적을 좌지우지한다.

'문 닫고 나가!'에서는 여기에서 어서 벗어나라는 명령보다는 당신과의 물리적 차단으로 보다 견고한 거리 두기를 원한다는 심리가 담겨 있으니 그가 문을 닫은 채 나가다가 머리가 문과 충돌하느냐는 중요치 않은 것이다.



 |덧말|

제목에서의 '고슴'은 어원이 12세기 문헌(선화봉사고려도경)에서처럼 '고솜'이 '송곳'의 의미로 보이나 명확지 않으며, 15세기 문헌에서 발견되는 '가시'나 '삐죽삐죽한 것'이라는 뜻으로도 보기도 하는데 이 또한 근거가 뚜렷하지 않다. 그러나 '고슴도치'를 도치倒置한 제목은 아니라는 점은 명확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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