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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롭지 않았고
죽어가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노래를 부르지 못했다.
가장 충만해지고 낙엽만 밟아도 시상이 떠올라야 정상인 가을인데.
고장 난 것이 분명하다.
내 감성 창고의 도어록 비밀번호를 잊어먹었고
심지어 창고의 주소마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틈 사이로 이성이
꼬물꼬물
고개를 내밀고 기어 나온다.
차갑고 딱딱하다.
더 이상 우울한 편지는 그만 써야 한다.
수신자를 비워놓고 한참을 타전한 신호들만 남아 있다.
애완견 별이가 방구석에 웅크리고 말이 없다.
동물은 아프면 스스로 갈 수 있는 가장 깊은 곳에 숨어 고통을 삼킨다.
별이의 몸을 뒤적거린다.
털 사이로 귀가 부어 있고 어떻게 긁었는지 피딱지가 보인다.
동물병원 의사는 오전에는 그날 온 동물들의 예약건만 진료한다.
오전 8시부터 진료인데 새벽 6시부터 개와 개주인들이 줄을 길게 늘어서 있다.
특이한 광경이다.
동물들은 하나 같이 건강해 보이고 목줄을 쥐고 있는 주인들이 피곤해 보인다.
동물병원은 동물이 가자고 졸라서 오는 병원이 아니니 그럴 만도 하다.
공감을 한 동물과 주인만이 동물병원에 올 자격이 있다.
감성이 살아 있는 공간이 된다.
동물병원 의사는 문진이 환자인 동물이 아닌 동물주인과 이뤄진다.
정작 아픈 부위를 볼 때에는 동물과 이야기를 나누는 의사다.
의사에게 동물이 좋아하는 페르몬이 묻어 있는지 안겨서는 얌전하다.
아픈 곳에 약을 바를 때에도 고분고분하다.
치료 부위가 가려져 털을 깎을 때에도 조용하다.
자신을 고쳐주려는 이라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만히 있다.
이러한 무언의 교감에서 감성을 배운다.
말로 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무언가에서 감성은 피어오른다.
별이를 안고 병원에서 나오며 가만히 물어 보았다.
예민한 니가 어찌 그리 잘 참았니?
혹시 의사 아조씨가 니 엉덩이를 꼬집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