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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Nov 14. 2023

미장원 명상

0520

머리를 하러 왔다.

커트를 할까
파마를 할까


망설이는데 디자이너가 어울릴만한 머리들을 보여준다.

하나같이 얼굴이 뛰어나다.

머리를 하러 왔는데 얼굴을 하고 싶어 진다.

사진이 맘에 들어도 얼굴과의 조합을 고려해야 시술 후 실망이 없다.

커트를 하고 디자이너가 자리를 뜨니 어깨에 머리카락이 첫눈처럼 소복하다.

손으로 뭉쳐 거울에 던지자 낙엽처럼 흩어진다.


긴 머리가 번뇌처럼 눈을 찌를 때 즘 되어야 미장원으로 달려간다.

어릴 적 이발소 트라우마는 머리 깎는 것을 두렵게 느끼게 했다.

타일로 촘촘한 시멘트 세면대에 앞으로 머리를 숙이면 벽돌 같은 빨랫비누를 머리에 문지른 후 우악스러운 이발사의 손가락은 뇌가 으깨지도록 머릿밑을 긁어 거품을 산처럼 만들었다.

가죽으로 날을 세운 면도날이 내 목덜미를 타고 내려갈 때엔 온몸에 소름이 이끼처럼 피어 만발했다.

롤을 꼬마김밥처럼 말면서 두상이 이쁘다느니 어느 이름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연예인을 닮았다느니 디자이너의 입담은 차라리 만담가에 가까웠다.


여전히 머리 깎는 일은 주사를 맞으러 가는 것처럼 힘들지만 미장원 문을 나올 때에는 마음과 기분이 사뿐해서 스스로 신기하다.

말린 머리 사이로 액체를 뿌리는데 시원하고 질퍽하다.

머리 위로 뜨거운 위성이 돌고 음악은 칸막이 없는 고객 사이에 커튼이 되어 구획한다.

아름다워지는 일은 시간을 죽이는 일이다.

그동안 추했던 것은 시간을 애써 살려온 탓일 게다.

어떤 것이 사라지면 어떤 것은 피어난다.

모두가 공존하는 건 불가능하다.

사막 한가운데 놓고 사라진 낙타가 돌아와야 할 텐데.

미장원은 순간 오아시스가 된다.

적요한 별들이 쏟아지는 이곳에 들리는 건 브런치를 지어내는 손타자기 소리뿐!

그녀가 건넨 메밀차가 노랗게 식어간다.


롤을 풀고 나면 어떤 이야기가 시작될까.


https://brunch.co.kr/@voice4u/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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