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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Mar 12. 2024

흘러갈 거야

0639

아무것도 묘사하거나 설명할 수가 없다.


눈앞에 보이는 것들의 이름을 모르겠다.


불려지지는 않아도 지칭된 바 있을 테니 그 지점을 더듬어 거슬러 되짚지 않는다면 무명의 사물이다.


색과 결도 나의 궁색한 어휘력으로 표현하기 어렵다.


감각에 객관이 어디 있겠냐마는 통상의 통념으로도 단절을 피할 길 없다.


오로지 남아 있는 것은 몇 개의 감탄사뿐이다.


아무튼 놀라운 광경을 보고도 엉거주춤하는 꼴이란 잉크 마른 펜을 쥔 심정이다.


휴대전화에 기생하는 사진기의 둥그런 촬영버튼만 연신 누른다.


늘어진 나뭇가지를 바다에 걸쳤다가 하늘에 겹쳤다가 버릇처럼 왼쪽 상단은 여백으로 비운다.


사진은 기록으로의 기능보다 브런치 표지로의 쓰임이 더 커진 지 오래되었다.


여기까지 와서도 글쓰기는 나의 그림자처럼 꼭 붙어 있다.



빛이 하는 일들이 이처럼 대견하다.


찍는 족족 빛에게 빚을 진 심정으로 휴지통으로 던진다.


눈앞에 펼쳐진 자연은 호랑이인데 찍어서 확인하면 고양이만 보인다.


반복할수록 귀여워지는 현실이 귀찮아지려 한다.


왜 이리 붙잡아 두려는 걸까.


풍경을

마음을

시간을

사람을

기억을


방금 내 뺨을 후려치고 간 바람처럼 이내 흘러갈 텐데.


가두느라 거두지 못한 것들을 후회한다.


붙잡느라 붙들렸던 것들을 폐기해야겠다.


영리하지 못했던 순간에는 집착들이 원을 그리며 춤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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