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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Mar 23. 2024

부활절 판공

0650

가톨릭 신자는 1년에 두 번 사제 앞에서 고백한다.


성탄을 앞둔 대림시기에 한 번

부활을 앞둔 사순시기에 한 번


그간의 지은 죄를 낱낱이 고한다.


죄를 모두 늘어놓은 후에 이렇게 요청한다.


이 밖의 알아내지 못한 죄에 대해 통회하오니 사하여 주소서


요즘엔 더 짧게 기도하지만 예전에 이러했다.


늘 고해마다 불성실한 신자인 나는 작은 죄를 몇 개 언급하다가 '이 밖의 알아내지 못한 죄'로 퉁친다.


알아내지 못한 게 아니라 알아내기 싫은 것에 가까울 것이다.


모든 것은 내 재량이다.


덜어내는 것도 둘러매는 것도 내 선택이다.



이 고백할수록 두렵지만 가벼워진다.

구술이 구체적일수록 죄는 투명하게 희석된다.


고백은 다짐이 되고 언약이 된다.


사제와의 공유가 되었으니 죄는 구속되었다.


고해소의 불이 켜진다.

들어가 사제와 칸막이 사이를 두고 무릎을 꿇는다.

성호를 긋는다.

머리를 조아린다.

고백이 시작된다.

사제의 기도가 머리 위에 성수처럼 뿌려진다.


부끄럽다.

두렵다.

자유롭다.

후련하다.

마음을 세탁한 기분이 든다.


곧 반복될 죄인이 될지언정 오늘만큼은 마음이 깨끗해진다.


고백성사는 고백하는 순간보다 고백할 죄를 돌아보고 되짚어보고 말로 추스르는 고백 전 단계와 고백 후 다시는 죄짓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보속기도를 드리는 때가 있어 가치가 있는 듯하다.


한 해 중에서 한 달, 나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고 들여다보고 고백하는 시간이 있다는 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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