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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May 09. 2024

하루는 나무

0697

하루는 추상이 아니다.

한 그루의 명백한 나무다.

하루의 씨를 심고 마침내 거둬들인다.

날마다 씨가 달라서 그 점에만 유의한다면 실패를 줄일 수 있다.

어떤 씨를 받아 쥐게 될지는 변덕스럽고 변동이 심해 아침마다 방송을 통해 '날(의)씨(앗)'를 알려준다.

곳(장소)에 따라

때(시간)에 따라

씨의 결이 달라지니 잘 다루라고 친절하게 알려준다.

씨는 중요해서 가장 주목받는 의상을 입고 가장 친근한 표정으로 전 국민이 알아듣기 쉬운 암호로 전해준다.

게다가 뭍에 사는 이에게는 너무나 낭만적으로 보이는 파도의 높이도 알려줘 바다를 그리워하게 한다.

내가 딛고 있는 바로 이 자리에 씨를 심는다.

날의 씨앗은 심는 즉시 자란다.

눈 깜빡임이 수분이 되고 발걸음이 거름이 되어 싹이 트고 줄기가 뻗고 잎을 내민다.

열매는 열리는 날도 있고 없는 날도 있다.

딱 하루만 자라고 사라진다.

정오가 오기 전에 나무는 다 자라고 세상으로 나가면 숲을 이루게 된다.

하루는 맹수들 사이에서 자라는 나무다.

오늘의 나무는 오늘에만 의미를 가진다.

내일에는 내일의 유일한 씨앗이 생긴다.

어제의 유쾌했던 기분이 오늘 표정을 싹 바꾸는 건 씨앗의 변동과 고유성이 이를 입증한다.

함부로 절망하거나 함부로 자신할 수 없다.

하루는 정적인 동물이 아닌 역동하는 식물이다.

나무는 나無인 양 내가 자주 사라져 존재를 따져 묻게 만들고 고독으로 가두고 알 수 없는 우주를 체험케 한다.

불현듯 나는 누구인가를 되묻는 건 하루가 온통 나무라서 그렇다.

오전 중에 나무의 성장은 가팔라서 지금 겨드랑이가 간질간질하다.

곁가지가 돋고 잎이 날개처럼 나오고 있다.

초록빛이 눈부시다.

나는 이토록 하루가 전부이고 초록인데 회색의 어제에 사로잡히거나 보라의 내일에 불안해한다면 얼마나 딱한 일인가.

오늘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하루의 나무에 돋아나는 잎의 수만큼이나 무수하다.


나무를 소리내면 입모양이 하루에 입맞추는 꼴이 되는 건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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