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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Oct 15. 2024

영화 고픈 날

0856

영화 고픈 날은 분명 문장 고픈 날이다


쓰고 나면 오래된 신발 같아지는 문장을 갈아 신기 위해 영화관을 찾는다


발 치수가 맞지 않을 때마다 뒤꿈치를 자르는 어리석은 행동을 멈추기 위해서다


영화관 좌석에 앉으면 거대한 책 한 권이 꽂혀 있는 도서관에 온 듯하다


활자는 스크린 뒤에 있어도 읽을 수 있다 한 뭉터기씩 내게로 날아온다 덥석 문다


고프다에는 空과 欲이 공존하고 있다


비어있는 것을 체감하는 것과 채우려는 것이 상충한다


공복보다 더 큰 의미는 보이지 않는 공간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채우는 기적에 있다


채워졌는가는 오로지 자신만이 감각할 수 있다



지나간 활자는 다시 넘겨 확인할 수 없지만 잔상들은 반복을 대신한다


혼자 쓴 책이 아니라 그런지 페이지가 잘 넘어간다


알아서 넘어간다 한 장 한 장 누락 없이 숨도 함께 넘어간다


눈을 감아도 넘어간다 두 시간 남짓의 독서로 한 권을 관통한다


빛이 없는 독서는 암실의 현상소처럼 나의 마음속 기억들을 무작위로 현상해 준다


기억 너머의 무의식까지도 죄다 잉크가 마를 때까지


영화가 고픈 날에는 극장으로 가는 버스를 탄다


영화를 읽으려고
 영화에 얽히려고


영화에 물든 두 시간이 이틀을 겨우 살게 한다


영화를 보고 나면 문장이 내 몸을 누에의 실처럼 칭칭 감는다


그 꼼짝달싹 못하는 결박의 순간을 황홀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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