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마지막 월급은 받지도 못한 채 사장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췄고, 우리는 쫓기듯 회사를 나와야 했다.
앞길이 망막했다.
왜 내 삶에 그놈이 끼여 들어 이지경 까지 왔을까란 생각과 함께 자책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당장 회사를 나오며 경제적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20여 년 간 한 번도 이직을 결심해보지 않았기에 우물 안 개구리 생활을 하고 있어서 자신감 또한 바닥을 치고 있었다. 늘 한 우물 속에서 헤엄치고 다녔기에 우물 밖 다른 세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당장 이번달부터 날아올 대출이자, 카드빚, 각종 공과금, 아이들 학원비, 어떻게 살아야 지란 생각만 앞섰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잡아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실컷 꼬인 실타래를 앞에 두고 있는 것만 같았다.
회사 또한 불명예 가득 앉고 한순간 거품처럼 사라졌기에 개발자 아닌 이상은 그 어디에서도 양팔 벌려 받아주려 하지 않았다. 자칫 그 똥물이 자신의 회사에도 튀길까 우려해서인지 평상시 알고 지내던 업체에 연락을 해보지만 만남조차 꺼려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죽어야 하나.'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도대체 무얼 잘못해서 이런 시련이 오는 걸까?라는 자책감 속에 술로 버티는 나날이 지속된다.
그렇게 폐인생활이 시작된 지 한 달이 돼 갈 무렵,
무엇을 해도 풀리지 않을 것만 답답함 속에 외출조차 하지 않던 그때, 전화 한 통이 걸려온다.
벨이 시끄럽게 울리지만 만사가 귀찮고 자포자기한 상태였기에전화벨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또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몽롱한 정신 속에 전화번호를 보니 모르는 번호다. 모르는 번호는 절대 받지 않던 나지만 아무 생각 없이 전화를 받는다.
수화기 저편에서 다정하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다.."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13전에 돌아가신 엄마의 목소리였다.
"엄마가 우리 아들 힘들어한다고 해서 전화했어."
전화를 받으면서도 분명 우리 엄마의 목소리가 또렷이 기억나는데도 믿기지 않았다. 난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엄마가 된장찌개 끓여 놨는데 먹으러 오지 않을래?"
"엄마, 지금 어디야?" 난 다급히 물었다.
"어, 우리 아들하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
"그동안 그럼 엄마는 거기에 계속 있었던 거야?"
"응 그럼, 항상 우리 아들 뭐 하고 지내는지 소식 듣고 있었거든."
"그럼 왜 한 번도 연락도 안 했어~"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안되었지만 분명 엄마와 대화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난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슬픔도 잊은 채 늘 투정 부리고 어리광 부리던 그때의 아들로 돌아가 있었다.
"우리 아들 지금 많이 힘들지? 그런데 민수야 멀리서 엄마가 지켜보듯이 너도 멀리서 너의 가족들을 지켜만 볼 거야?"
"이제부터 엄마가 하는 얘기 잘 들어, 절대 약한 마음먹지 말고 기억하고 또 되새겨야 돼 알았지?"
"응..."
"지금 너의 삶은 단지 단순한 시련일 뿐이야. 생각해봐 네가 스무 살 무렵 사업에 뛰어들었을 때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돌아다니던 성민이였잖아... 그때 엄마 맛있는 거도 많이 사주고 용돈도 준거 기억 안 나? 그런데, 민수야 물이 고이면 썩게 되어 있어 지금이 기회야 오히려 너의 운이 바뀌려고 하고 있어, 너를 그 썩어가는 물에서 끄집어내려고 하늘이 움직이고 있는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당장 내일 빚 걱정부터 앞서는 걸."
"네 주변으로 하나 둘 사람들이 모일 거야, 분명 네가 베풀었던 사람들이 너와 함께 할 거야 그 사람들과 꼭 함께 하고 지금 당장부터 네가 잘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하나하나 적어봐. 꼭, 성민아."
술에 취해 몽롱해 있었지만 난 엄마의 말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듣고 있었다. 평생 토록 나에게 조언보다는 걱정과 베풀기만을 해주던 엄마였기에 처음으로 엄마의 조언은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것만 하면 되는 거야, 엄마?"
"그래, 일단 너 목욕부터 갔다 오고 술은 절대 먹지 말고 엄마가 맛있는 된장찌개 끓여 놓을게."
"응.. 엄마"
그렇게 대답한 순간 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꿈이었다. 그런데 너무도 생생한 꿈, 한 번도 꿈에 나오지 않던 엄마가 꿈에 나와 나에게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언 한 달 동안 집 밖을 나서지 않았고 씻지도 않았기에 노숙자나 거의 다를 바 없었다.
무일푼이었지만 아내가 몇 개월 전 쥐어준 사우나 티켓이 아직 지갑 속에 남아 있었다. 그래도 꿈이라기엔 너무도 생생했고 마치 엄마가 환생한 듯 이야기해 준 조언을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 한 달여 만에 주섬 주섬 옷을 챙겨 입고는 집 밖을 나와 동네 사우나로 발길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