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도 엄청 많이
우리 동네 단지에는 고양이가 많다. 사람에게 가까이 오는 친근한 스타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사람을 겁내지도 않는다. 딱 시골 사는 고양이들처럼 급할 것 없이 느긋하다.
우리 집 앞마당도 동네 고양이들의 산책길인지 종종 거실 창 앞을 지나가는데, 보리와 콩이가 고양이를 발견하는 날은 흥분해서 짖으며 뛰어다니느라 집이 야단법석이다. 고양이들은 창문에 매달려 목청 높여 짖는 개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가던 길을 간다. 걸음은 또 어찌나 여유롭고 느린지 개들을 잡고 말리는 시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가 없다.
이번 어린이날에는 같은 타운하우스 내 초등학생이 있는 집들이 모여 어린이날 행사를 진행했다. 각 집의 마당을 돌며 풍선 터트리기, 훌라후프, 이어달리기, 보물찾기 등을 신나게 진행하고, 드디어 마지막 집으로 모였다. 아이들은 그 집 마당에 쳐둔 대형 텐트에 모여 놀고 어른들은 맥주 한 캔씩 손에 들고 뒤풀이를 즐기다 보니 11시에 시작한 행사가 어느새 5시가 되었다. 자리를 정리하고, 친구들과 헤어지기 아쉬워 발이 잘 떨어지지 않는 아이들을 달래 문을 나섰다.
인사를 하고 이제 집에 막 가려던 차, 시끌시끌 소리가 나서 쳐다보니 몇몇 아이들이 돌담 근처에 모여있고 돌담 위에는 회색 줄무늬 고양이 한 마리가 우뚝하니 서있다. 입에 무언가 물고 있어 혹시 쥐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새끼 고양이다. 고양이가 아이들을 마주치고는 다시 돌아가지도, 땅으로 내려가지도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얘들아, 고양이가 불안하면 새끼를 놓고 갈 수도 있대
그러니까 우리 좀 멀리서 지켜봐 주자.
아이들은 알았다고 하면서도 궁금해서 자꾸만 자꾸만 다가가고, 고양이는 슬그머니 마당 쪽으로 이동한다. 동물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하임이도 눈을 떼지 못하고 홀린 듯이 다시 친구네 마당으로 들어간다. 대문 앞에 서서 조금 기다려보지만 역시나 선뜻 올리가 없다. 다시 들어가 보니 마당 한쪽에 아이들이 쪼그려 앉아있고 그 앞에는 작은 박스 안에 몸을 누이고 있는 고양이가 있다.
- 어머. 고양이가 아예 자리를 잡았네요.
- 네. 사람을 무서워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아침에는 앞집에 계속 들어가려고 하더니 이번엔 저희 집으로 왔네요. 먹을 게 없어서 참치캔 하나 줬어요.
하임이가 옆에서 이야기를 듣더니 내게 집에 남아있는 고양이 사료를 갖다 달라고 주문한다. 나는 순순히 집에 가서 사료를 통째로 들고 달려와 한줌 꺼내주고, 나머지는 친구 엄마에게 전해준다.
고양이는 걱정이 무색하게 경계는커녕 아이들에게 둥글게 둘러싸여 있는데도 편안하게 젖을 먹이면서 참치캔과 사료를 오독오독 씹어 먹는다.
하임이가 책에서 읽은 고양이 코인사를 시도해 보려 손가락을 내미니 코를 톡 부딪히기도 하고,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며 몸을 비벼댄다.
- 엄마, 얘가 나한테 몸 비벼! 자기 거라는 표시인데!
하임이가 신난 얼굴로 외친다. 예전 어린이집 앞에 살던 길고양이와 오가며 인사를 하다가 고양이에게 푹 빠졌고, 고양이 관련 책을 사줬더니 열심히 공부해서 고양이 박사가 되었다. 몸을 비비는 것은 고양이의 애정 표현중 하나로 '이 사람은 내 거다', '여긴 내 영역이다' 등의 메시지라고 한다.
어미고양이가 움직이자 품에 있던 새끼 고양이가 꿈틀꿈틀 움직인다. 세상에. 정말 주먹크기도 되지 않을 만큼 작다. 아직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모양이다. 이렇게 작은 고양이 새끼라니, 안아보고 싶고 쓰다듬어 보고 싶은 마음이 마구 샘솟는다. 하지만 어느덧 저녁 시간이 다가오고, 호들갑을 떨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아이들을 달래본다.
얘들아, 우리가 계속 이렇게 보고 있으면 엄마 고양이가 불안해할 수 있으니까
이제 다들 집에 가자. 고양이들 좀 쉬게 해 주자.
착한 아이들.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고양이를 위해서 이제 헤어져야 한다고 하니 다들 아쉬움이 가득한 눈으로 일어선다. 얼마나 아쉬울까 안쓰러운 마음도 든다.
'얘들아, 너무 귀엽지. 아줌마도 마음 같아서는 고양이 집 앞에 텐트를 치고 하루 종일 새끼 고양이 보고 싶어.'
집에 돌아온 하임이는 그 집 친구에게 빌려주겠다고 고양이 책을 찾아 두었고, 저녁부터 다음날 아침 등교하기 전까지도 책을 읽다가 갔다.
하임이의 학교 방과 후 수업이 끝나고 돌아와 가방과 옷을 정리하고 있던 차, 내 눈이 동그래진다.
거실 창 앞에 어제 그 고양이가 혼자 와있다.
- 하임아! 어제 고양이가 우리집 앞에 왔네!
- 우와! 정말이네 나 가볼래!!
창문을 열자 고양이가 방충망에 몸을 비비며 인사하려다가 보리와 콩이를 발견하고서 하악질을 한다. 개들도 참 우습고 귀여운 것이, 창문을 열기 전까지는 마구 짖더니 막상 창문을 열어두니 놀라울만치 조용하다. 고양이의 하악질을 본 콩이는 꼬리를 잔뜩 숨겼다. 겁 많은 우리 개들..
고양이는 개들이 무섭지도 않은지 도망도 안 가고 바로 앞에서 눕기도 하고 뒹굴다가 그 사이 뛰어나간 하임이와 인사를 하고 함께 논다.
- 여보! 나도 나가서 고양이 보고 올게!
나도 슬리퍼만 신고 뛰어 나간다. 우리집에 와있으니 실컷 예뻐해줘도 된다는 마음에 신이 난다.
- 엄마, 고양이가 우리 집에도 와줬네!
- 그러게. 어제 아쉬웠는데 너무 반갑다.
- 엄마 나도 고양이한테 참치캔 주고 싶어.
- 사람 먹는 거 주면 안 좋을 텐데.. 엄마가 나중에 고양이 간식 하나 주문해 줄게
- 아! 엄마! 집에 멸치 없어? 멸치도 먹는대.
고양이 책에 고양이가 멸치를 먹는다고 쓰여있었다고 한다. 후다닥 멸치를 한 줌 가져와 주었더니 허겁지겁 먹는다. 작은 입으로 한참이나 아구아구 멸치를 씹어 먹더니 배가 부른 지 자리를 옮겨 드러눕는다.
하임이는 턱을 괴고 마주 앉아 멸치 먹는 모습도 관찰하고, 기다란 나무이파리를 찾아 놀아주기도 하고, 궁디팡팡도 해주며 한참이나 행복한 시간을 누렸다.
우리집에서도 가끔 쉬어갔으면 하는 바램을 담아 기저귀 박스도 꺼내두었다.
다음 날 동네분들과의 모임에서 전해 듣기로는 동네 끝에 위치한 집에서 새끼를 8마리를 낳았고, 그중 4마리는 태어나자마자 죽었다고 한다. 아직 성묘라고 하기에는 어려 보이는 고양이였는데 8마리나 낳느라 꽤나 고생했을 것 같다. 용케도 잘 보살펴 줄 집을 고른 건지 집주인분이 황탯국도 끓여주며 지극정성으로 산후조리를 해주고 계시다고 해 한시름 마음이 놓인다.
우리 집에도 왔었다고 말을 꺼내니 다들 자기 집에도 한 번씩 왔다 갔다고 이야기를 거든다. 새끼들은 끝 집에 안심하고 둔 채로 동네의 이 집 저 집을 왔다 갔다 하며 먹이도 먹고, 애교도 부리고 산책도 하며 행복하게 사는 모양이다. 요즘 길에 사는 동물을 괴롭히는 이상한 사람들이 많아 길고양이들이 사람을 너무 좋아해도 걱정인데 다행히 동네 분들이 모두 생명을 소중히 여겨주고 있는 모습을 보니 괜히 마음 한켠이 뭉클하다.
남은 4마리의 새끼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엄마고양이와 함께 산책나오길 기다려본다.
맛있는 멸치랑 츄르를 준비해둬야지.
그 나라의 인권 수준과 도덕성은 동물들을 대하는 태도로 알 수 있다
-마하트마 간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