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이 우리 집에?

알래스카 사계절

by voyager 은애




내가 사는 곳은 곰의 나라, bear country 다.


알래스카에는 세 종류의 곰이 산다. 불곰이라 불리는 브라운 베어, 작고 민첩한 블랙 베어, 그리고 하얀 털을 가진 북극곰, 폴라 베어. 그중 내가 사는 섬에는 블랙 베어가 터전을 잡고 있다. 덩치는 브라운 베어보다 작지만, 나무를 잘 타고 순간적인 민첩함은 놀라울 정도다. 사람을 마주치면 도망간다고 하지만, 곰은 그래도 곰이다.


저녁 무렵, 운전 중 길가를 어슬렁 거리는 곰과 만날 때가 있다. 밤마다 동네를 돌며 쓰레기통을 뒤지는 건 거의 일상처럼 느껴진다. 이곳에서 하이킹을 할 때는 음악을 틀거나 노래를 부르며 걷는다. 우리의 존재를 곰에게 알리기 위해서다. 조용히 다가오다 마주치는 것만큼 무서운 일은 없기 때문이다.


겨울이 시작되기 전, 11월이면 곰은 굴로 들어가 긴 겨울잠에 든다. 그리고 이른 봄, 스컹크 캐비지가 땅 위로 얼굴을 내밀 때 곰도 눈을 뜬다.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곰이 제일 먼저 찾는 식물도 바로 스컹크 캐비지다. 올해는 5월이 되어서야 노란 꽃을 피우기 시작했으니, 유난히 추운 봄이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곰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듯, 2주 전 어느 날 밤 우리 집 앞마당을 방문했다. 이곳에서는 쓰레기통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 곰이 늘 먹을 것을 찾아 어디든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윗집에서 아무렇게나 내놓은 쓰레기통 탓인지 곰은 우리 집을 놀이터 삼아 종종 찾아온다.


작년 가을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곰이 나타나 쓰레기통을 엎고 뒤졌다. 어느 날 아침, 곰은 윗집 쓰레기통을 뒤지느라 떠날 생각이 없었다. 나는 곰이 사람 소리에 놀라 도망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큰 소리를 내며 다가갔다. 하지만 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행동이 얼마나 위험했는지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어느 날엔 현관문을 여는 순간 곰이 코앞을 지나갔다. 순간 너무 놀라 문을 닫았는데 심장이 쿵쾅쿵쾅 뛰면서 진정되지 않았다. 얼른 창밖으로 지나가는 곰 사진을 찍었다.

이곳에선 차량 보험을 들 때도 곰 피해 보상 항목을 포함시킬 수 있다. ‘포괄적 담보(Comprehensive Coverage)’라는 이름으로, 곰이 차를 긁거나 부수고 내부를 엉망으로 만들 경우를 대비하는 것이다.

실제로 차 안에 음식물을 두었다가 곰이 문을 부수고 들어간 사례도 있다. 맥도널드 포장 쓰레기를 치우지 않고 뒀던 지인의 친구가 아침에 보니 차 안이 아수라장이 돼 있었다고 한다. 곰이 냄새를 맡고 차문을 부수고 들어간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후, 나는 음식물 관리에 더욱 신경 쓰게 되었다.

곰을 가까이서 본 이후로는, 관광객처럼 일부러 곰을 찾아다니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크루즈로 오는 관광객들이 곰을 보러 가는 헤링 코브 같은 관광지가 있지만, 나는 그럴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는다. 올해는 제발 곰과 마주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친구집 베란다에 찾아온 곰, 스컹크 캐비지






스컹크 캐비지가 피는 봄이 지나면, 이곳에 짧지만 찬란한 여름이 온다.

알래스카 여름은 정말 시원하고 해만 뜨면 날씨는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쨍쨍한 햇살, 시원한 바람. 이런 날이 매일 이어진다면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살고 싶어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날이 드물기에, 더 소중하고 행복하다.

이 섬에 이사 온 둘째 해 여름, 집 근처 바닷가에 아이들이 수영할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했다. 이름은 로터리비치. 도대체 어디에서 수영하는 거지? 해서 가봤더니 웅덩이였다;;^^ 게다가 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와~알래스카 사람들은 진짜 터프하구나!!"

다음 해 여름, 아이들은 그곳에서 다시 물놀이를 시도했다. 유니콘 튜브 두 개를 사주었는데 그날 딱 한번 쓰고는 깊숙한 서랍 안에 보관 중이다. 너무 추워서 도저히 할 수가 없다고 했다.



얼음장같은 알래스카 바다에서 노는 아이들




이 짧은 여름이 지나면 곧바로 가을이다.

하루가 다르게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고 오후 3시면 어두워진다. 비와 어두움. 이곳 가을의 대명사다.

가을에 시작되는 아이들 야외축구는 그야말로 빗속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경기다. 아이들의 축구를 지켜봐야 하는 부모들도 비옷을 입고 응원하지만 홀딱 젖을 때가 많다. 비가 와도 경기를 취소할 수 없는 이유는 그렇게 취소해 버리면 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날, 첫째의 마지막 축구 결승전이 열렸다. 우산을 쓰는 사람은 보기 드물지만 이제 몇 년 살아보니 이런 날에는 그냥 우산을 들고 가는 게 최고다. 우산이 뒤집어지지 않게 두 손으로 꼭 붙잡고 경기를 지켜보며 응원한다. 알래스카 가을의 일상이다.



강하다! 알래스칸 들이여!




그리고 다시, 긴 겨울이 시작된다.

집집마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아쉽게도 우리집엔 난로가 없다. 그 말은 추운 겨울을 어쨌든 잘 버텨야 한다는 의미다. 이곳에서 한 해 두 해 겨울을 지나다 보니 겨울을 잘 지내는 나만의 비법을 터득했다. 집안을 환히 밝혀주는 데일라잇 전등, 침대 위에 설치한 작은 텐트, 나의 가장 애용물인 작은 전기 히터 그리고 정전 대비용 헤드라이트. 그렇게 긴 겨울을 견디다 보면 다시 스컹크 캐비지가 피어나며 봄을 알린다.


알래스카 캐치캔



알래스카의 계절은 흐릿하고도 선명하다.

하루 안에서도 사계절이 공존하는 듯한 날씨, 긴 겨울의 그림자와 짧고 강렬한 여름 햇살.

그 속에서 곰과 공존하며, 그렇게 나는 조금씩 이곳의 리듬에 스며들고 있다.


그 모든 시간이 내게는 선물이었다.

감사하다. 이 특별한 땅에 발을 딛고, 이 계절들을 살아가고 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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