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교사로서 영어를 잘하고 싶은 마음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열망이 지나쳤던 아직 젊었을 30대 중반, 결혼한 지 6년 차, 과감히 유학을 결심한다. 2003년 당시에는 유학휴직이 많지 않았다. 담당 장학사도 서류 준비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아 헤매는 모습을 보이니 준비하는 내내 불안했다. ‘유학휴직을 할 수는 있는 건가?’ 서류도 10가지가 넘어 준비할 것이 많았지만 그때만 해도 아픈 데가 없었고 복잡한 서류 준비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결혼한 여자가, 아이도 있는 여자가 갑자기 유학을 간다고?’ 지금 생각하면 무모한 결정과 시도다. ‘남자가 간다고 해도 그렇게 생각할까? 왜 여자는 꿈조차 꿀 수 없는 걸까?’ 반항심도 있었다. 남편의 반대는 예상대로 거셌고 딸은 어렸다. 아토피도 심해 엄마의 보살핌이 절실한 때였다. 나의 꿈도 절실했다. 지금이 아니면 점점 더 가기 어려울 거 같아 달리는 말처럼 앞만 보았다. 옆을 보면 내가 유학을 가지 못할 이유는 가로수처럼 널려있었다. 미안함은 다녀와서 갚자. 지금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무모함을 동력으로 한 추진력이라는 자동차는 나를 어느새 *‘IDP’라는 곳으로 데려다준다.
유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유학원에 내는 수수료도 아까워 다니던 *‘IELTS’ 학원에서 소개해주는 ‘IDP’를 찾아갔다. 친절히 상담 해주시던 분이 아직도 생각난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유학 준비를 마쳤다. 미국은 물가도 비싸고 총기소지 허용국가라 겁이 났다. 캐나다는 춥고, 영국은 물가가 비싸다. ‘자연이 살아있는 호주가 좋겠다. 그럼 호주의 어느 도시로 갈 것인가?’ ‘시드니’는 집 구하는 데 돈이 많이 들고 한국 사람도 많다고 하니 호주의 유럽이라는 ‘멜번’으로 가자. 사람들이 ‘멜번’을 잘 모를 때였다.
학교입학부터 생활, 주거까지 전반적인 것에 걸쳐 ‘IDP’로부터 무료로 도움을 받고 드디어 ‘멜번’에 도착한다. 완전히 영어로만 생활해야 하는 시간이 펼쳐진다. 그나마 다행인 건 경제적인 것을 해결하기 위해 일을 해야 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영어의 바다에 빠지고 싶어 뛰어들었지만 바다 속 수영은 어려움이 많았다. 영어에 노출되고 싶어 찾아간 곳에서 영어의 감옥에 갇혀 팔다리가 묶인 사람처럼 몸을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말더듬이가 되어 머리 속은 온통 하얗고 그 많던 영어단어들은 온데 간데 없었다. 학교에서 서류나 행정처리를 할 때, 은행에서 계좌를 만들 때 내 뒤로 긴 줄을 만들었다. 상대하는 직원은 처음에는 친절하지만 두 세 번 반복해도 못 알아들으니 얼굴색이 변했다. 어디를 가도 두리번거리기 일쑤요, ‘sorry’와 ‘pardon’은 제일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되었다.
공부해서 시험에 합격하고 가기만 하면 될 줄 알았지만 더 많은 시험이 내 앞에 놓여있었고 하나하나 깨부수는 재미가 아니라 내가 깨지는 아픔을 겪었다. 자유로움을 추구한 시도는 무모해도 너무 무모했고 사소한 생활 하나하나가 도전이었다. 지금은 인터넷이 잘 되어 정보도 많고, 가려는 도시를 검색만 해도 블로거들의 정보가 넘쳐나지만 2003년에는 그렇지 않았다.
*IELTS: 언어의 4가지 영역인 Listening, Reading, Writing, Speaking을 평가하며, 영어권 국가로의 유학 이나 이민,취업을 희망하는 사람들의 영어사용 능력을 평가하는 시험
*IDP: IELSTS시험 주관사로 영어권 6개국 국가별 유학전문가가 상담을 도와주는 기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