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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 Aug 19. 2024

'넌 도대체 이름이 뭐니?'

'아휴, 깜짝이야!'

대학원 수업은 3월부터지만 오리엔테이션을 위해 멜버른에 2주 전에 도착했다. 잘 적응하도록,어려움이 없도록 배려해주는 오리엔테이션은 자세히 철저히 친절히 이루어졌다. 영어를 잘 못 알아듣기 때문에 모든 것이 어려워 보일 뿐이다. 높으신 분의 인사말 후 게임이 시작되었다. 종이에 적힌 10가지를 제일 빨리 갖고 오는 팀이 이기는 게임이다. 10가지 중 아기나 어린아이 사진을 갖고 오라는 것이 있었다. 얼른 방에 가서 딸 사진을 갖고 왔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다. 내가 20대 이고 당연히 미혼인 줄 알았다며 다들 놀란다. 나는 동안도 아니고 30대 중반이니 이런 반응에 기분이 좋기는 했지만 얼떨떨하기도 했다. 그렇게 재미있는(?) 게임이 끝나고 같은 건물에 사는 학생들 모임, 같은 층 기숙사생들의 모임이 있었다. 

    

말레이시아, 태국, 싱가폴, 이란, 호주 그리고 한국. 각 층을 돌아다니며 무엇이 있는지 보고 웃고 떠든다. 다들 영어는 문제가 안되는 기본중의 기본이다. 내가 제일 못 알아듣고 말도 제일 못한다. 겨우 단어만 몇 개 알아들을 뿐. 절망, 실망, 좌절 등의 감정이 순식간에 밀려든다. ‘잘 해낼 수 있을까? 에이, 어떻게 되겠지?’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져볼 뿐이다.    

           

어느 날인가 창밖을 내다보는데 창문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있는 나무에 뭔가가 오르락 내리락한다. ‘청설모인가? 아니면 다람쥐? 산속도 아닌데 혹시 여우? 넌 도대체 이름이 뭐니?’ 눈을 맞추고 자세히 쳐다 보았지만 무슨 동물인지 도저히 모르겠다. 그놈이 빤히 나를 쳐다보는 게 아닌가? 평소에 애완동물과도 친하지 않으니 두려움부터 일고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커튼을 닫고 마음을 진정시킨 후 다시 열어젖혔는데 그때까지도 그놈이 새까만 머루알 같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거다. ‘아휴! 놀래라’. 다시 커튼을 닫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파섬(possum)이었다. 파섬은 호주와 뉴질랜드에만 있는 동물로 청설모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크기는 약 2배쯤이다. 가끔 밤에 길을 걷다 그림자가 바닥에 깔려 위를 쳐다보면 파섬이 전기줄에 거꾸로 매달려 있거나 재빨리 지나가고 있다. ‘아휴, 깜짝이야!’  

   



우연히 여행 잡지를 읽다 접한 기사를 보고 놀랐다. 호주에서는 나무와 동물을 사랑하고 소통하는 정도가 사람을 대하 듯 한다는 것이 실감난다.  

    

‘멜버른 시에서 제작한 어반 포레스트 비주얼(Urban Forest Visual)이라는 대화형 지도 사이트에 접속하면 멜버른시 관할구역에 위치한 7만 그루의 나무에게 이메일을 보낼 수 있다. 어떤 나무든 클릭하면 개별 나무의 종류와 수령, 고유한 ID번호와 메일 주소가 뜬다. 원래는 나뭇가지가 파손됐거나 보호가 필요한 나무를 쉽게 신고하도록 만든 지도인데, 당초 목적과 달리 나무를 향한 러브레터가 쇄도하기 시작했다. 2013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올해 2월 빅토리아주에 대형 산불이 발생했을 때에도 메일함엔 멜버른의 나무들을 향한 걱정 어린 메시지가 가득했다. 불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라는 따스한(다소 귀여운)충고와 함께, 멜버른에서 나무는, 정원은, 자연은, 사랑과 동의어다.’    

  

 이쯤 되면 나무를 사람대하듯 하는 것 맞지 않는가? 남편과 뒷산을 자주 등산하는데 유독 눈에 띄는 나무가 있다. 오를 때 내려올 때 한번 씩 그 나무를 쓰다듬어준다. 낮은 키의 단풍나무인데 산수화에서 본 듯 자태가 고혹하다. 매끈하고 얄캉한 몸통에 풍성한 잎을 매달고 있다. 겨울에는 앙상하지만 봄이 되면 어김없이 새잎이 돋아나 우리를 놀라게 한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나무와 교감하는 것이 느껴진다. 오며가며 눈길도 주고 매만지고 우리를 반겨주는 듯 서 있는 자태가 고맙다. 다음에는 이름도 지어주어야겠다. 어디에나 눈에 들어와 마음을 흔드는 것들이 있게 마련이다. 


출처: ‘Travie’ 2024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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