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에미리트, 두바이
꿈속에 저승사자가 나와서 집안의 어르신들을 데리고 간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넌다. 어르신은 인자한 미소와 함께 마지막 인사를 한다. 돌아가신 어르신이 있는 집에서는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나는 저승사자도 강도 배도 딱히 두렵지 않다. 나와는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고 내 차례는 아직 아니니까. 아니 나는 아직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없으니까.
아침에 세수를 하며 거울을 보니 얼굴에 기미가 생겼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승꽃이 얼굴 군데군데 활짝 피었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은 나에게도 그렇게 죽음이 스멀스멀 다가오고 있었다. 단순 노화의 과정인데 괜히 찝찝하다. 그 찝찝한 기분만큼 두 배로 자외선 차단제를 바른다. 아마 중동에 있는 동안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지 않아 기미가 더 많이 생긴 것 같다. 기미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노화보다는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지 않은 습관을 탓한다.
호텔방의 암막 커튼을 친다. 창 밖으로 누런빛의 두바이 마천루가 보인다. 오늘도 햇빛이 쨍하다.
아무것도 없는 이 모래 구덩이를 빌딩 숲으로 채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엔지니어들이 얼굴에 기미를 잔뜩 얻어 갔을까.
전시회가 열리는 동안 두바이 전체가 부산스럽다. 호텔 로비에는 전시용 포스터와 데모 장비들이 쌓여있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긴장과 피로가 역력하다. 반면 나는 아주 여유롭다. 이미 몇몇 업체들과 미팅을 끝냈고 마지막으로 화재 관련 성능 검증 기관과의 미팅을 마무리하면 공식적인 나의 업무는 끝이다. 전시회장으로 가기 전 늦은 아침을 먹고 커피를 한잔 마셨다.
주최 측의 실수로 북한으로 등록되었다. 두 번의 프레젠테이션 일정이 있었지만 북한 소속이란 것이 딱히 문제는 되지 않았다. (되려 대화의 첫마디를 쉽게 열 수 있었다.) 전시회의 타이틀이 안전 및 보안 관련이라 재미있는 것들이 많았다. G바겐을 개조한 장갑차, R8 순찰차등을 입구에 배치하여 방문객의 눈길을 끌며 호객 행위를 하고 있었다. 케블라 타입의 내마모성 코팅제, VIP 의전 차량용 방탄유리 필름 등 시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신기술 제품들이 많은 부스에 있었다.
일반 전시회와 달리 부스에서는 명함도 계약서도 오고 가지 않는다. 제품 브로셔보다는 기술 설명 포스터에 사람들이 더 많이 몰린다. 제품이 적용된 고객사 list 보다 그 원료 물질에 더 관심이 많다. (아무도 제품을 자기 회사에 적용시킬 권한이 없다. 대부분 힘없는 엔지니어 들이니까.)
확실히 엔지니어 색이 강한 전시회를 오면 재미있는 기술들이 많다. 언젠가 어디선가 제대로 된 대우를 받을 (아직 상용화하기에는 이른) 제품들의 재롱 잔치다. 어차피 이 도시 전체도 상상과 거대한 자본을 토대로 한 기미 많은 엔지니어들의 결과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