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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연 Dec 07. 2024

닿을 수 없는 거리 7화

죽음을 생각한 후 나의 삶은 바뀌었다. 조금은 살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고, 어느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되었다. 상처받는 일이 적어졌고, 마시는 술이 줄어들었고,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죽지 않을 사람이 된 것과 죽음을 스스로 정할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 굉장한 행운이었다.


죽을 날을 정하는 것은 나에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진이의 1주기에 맞춰 나도 진이에게로 가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진이는 내가 자신을 잘 찾아올 수 있게 자신의 자리를 예쁘게 꾸며놓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어딘가에 있을 진이와 진이의 가족을 보기 위해 매일 어딘가에 있을 신에게 기도했다. 제발 진이를 잘 찾을 수 있게 해달라고, 지나치거나 덜 가는 일 없이 알맞게 진이에게 갈 수 있게 해달라고 빌고 빌었다. 세상에 보이는 모든 것들에게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되었지만, 내가 볼 수 없고 막연한 믿음으로 존재하는 어떤 신에게 바라는 것은 기도를 하며 마음껏 바랄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나는 하루하루 편안하게 죽음과 가까워졌다.


누가 나를 발견하거나 먼저 찾아올지 몰라서 유서 같은 편지를 남기지 않으려고 했지만, 나는 내 죽음을 누군가에게 설명할 의무가 있었다. 이곳에는 나의 자리도 분명 있었기에, 나는 그 자리를 아는 사람들에게 내가 자리를 옮기는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안녕하세요, 김설희입니다. 제가 이렇게 죽음을 택한 것은 이 삶이 불행하다거나 어떠한 막막함이 있다던가 하는 그런 우울한 이유는 아닙니다. 저는 어느 순간 이곳에 있는 제 자리가 매우 불편하고 어색해졌습니다. 제가 사는 이유에 대해서, 상처를 받는 이유에 대해서, 무언가를 소망하고 무언가로 인해 좌절하는 이유에 대해서, 그 필요성에 대해서 의문을 가졌습니다. 이곳은 제 자리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매일매일이 의문으로 가득했고, 저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떠나 그 사람 곁에 있을 제 자리에 있고 싶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꽤나 행복했습니다. 좋은 사람들도 만나고, 좋아하는 일도 찾으며, 제 삶의 정원을 아름답게 꾸며나가며 그렇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러한 생각도 죽음을 선택한 이후에 하게 된 생각이지만, 나름 열심히 그리고 알차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안락한 곳이 필요했습니다. 그 자리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의 곁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그 곁으로 가려고 합니다. 저를 사랑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여러분도 후에 이 세상을 떠나 제가 있는 곳으로 오게 되실 때 제가 보고 싶으시다면 찾아와 주셨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저의 자리를 예쁘게 꾸며놓겠습니다. 그럼 잠시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진이가 나를 떠나간 지 1주기가 되던 날 의자에 올라 진이가 갔다 그 길과 최대한 비슷한 길로 죽음을 택했다. 몸에 힘이 빠졌고, 시야가 흐릿해졌다.


눈을 뜨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진이를 찾으려 걷고 또 걸었다. 어떠한 빛도 보이지 않았고, 어둠도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진이가 이곳에 있으리라는 확신이 나에게는 있었다. 진이도 이곳을 걷고 걸었겠지, 할머니와 그의 어머니를 찾으려 계속 걸었겠지. 진이도 나와 같은 확신을 가지고 같은 길을 걸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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