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을 걷다 보니 익숙한 장면들이 눈앞으로 짧게 스쳐 지나갔다. 그 속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들 나를 두고 먼저 이곳에 온 사람들이었다. 매일, 자주 들어다 보지 않는 그 기억 안에서 나에게 사랑을 주었던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이곳이 내 자리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으로 점차 빠져들었다. 이곳에서 나는 있고 싶었다. 순간적인 감정인 것을 알았지만 나는 그 순간적인 감정 안에서 행복과 그리움을 동시에 느끼며 있고 싶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진이가 만들어둔 자리가 분명히 있을 것이었고, 나는 그곳을 찾아가야만 했다.
기억을 찬찬히 돌아보며 마치 내가 경험하지 않았던 일처럼 홀로 감동하며 구경했다. 그곳에는 잊고 있었던 모든 기억들이 저장되어 있었다. 모든 기억들과 모든 감정들, 그때 내가 경험했던 삶 그대로의 모습이 어떠한 변함이 없이 그대로 있었다. 어쩌면 당연하게 생각했던 ‘살아감’이 뜻을 보인채로 나에게 다가온 것 같았다. 마치 나는 아직 이곳에 오면 안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감성에 젖어 회상을 하던 도중 낯섦과 반가움의 기억이 보였다. 진이를 처음 만난 날, 함께 맥주를 마시던 날, 울면서 진이를 붙잡았던 날들이 차례대로 보였다. 그 기억들은 이곳에 온 나를 환영해 주는 듯했다.
진이는 어디에 있을까? 언제쯤 볼 수 있을까 하며 보이는 길마다 나의 발자국을 남기며 나아갔다. 지금까지 살면서 나는 모든 것들에 후회를 남기며 살아왔던 것 같다. 그동안 했던 모든 선택들, 순간적인 마음에 보냈던 모든 인연들이 후에 나에게 후회로 다가왔다. 잘못된 선택은 없다고 누군가 나를 타일렀지만, 그 말을 들은 순간 나의 후회는 더 크게 자라나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진이를 만나게 된다면 어쩌면 내가 한 선택 중 가장 큰 선택을 한 후 걸어가는 이 길이 유일하게 내가 후회하지 않을 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애가 탔다. 보였던 기억들이 흐려지기 전에, 나의 선택이 후회가 되기 전에 진이를 찾아야만 했다.
바로 앞에 큰 문을 한 어떠한 벽이 있다는 것을 감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별로 지나지 않아 나의 삶에 대한 기억은 끝이 났고, 문이 굳게 닫힌 채로 나를 가로막고 있었다. 문을 열려고 앞으로 다가가자 각인되어 있는 글이 보였다. 그 글에는 이곳을 지나간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느껴졌다. 곳곳에 사람들의 머뭇거림과 확신이 얼룩진채로 각인을 꾸며주고 있었다.
<당신의 삶은 충분했나요? 온 감각으로 모든 것들을 누렸나요? 모든 꿈들에 당신의 시간을 남겨두었나요? 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당신의 남은 시간은 모두 사라져 버립니다. 동의하신다면 들어오세요.>
나의 삶은 충분했었나, 모든 것들을 누렸나, 나의 꿈 나의 꿈은 무엇이었나, 나의 꿈이 진이를 만나고 그 옆에 있는 나의 자리를 찾는 것이 끝이었을까, 나의 시간을 후회 없이 다 쓰고 온 것이 맞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참 이상하다. 진이에 대한 기억을 읽고 볼 때까지만 해도 이곳에 확신이 있었다. 나는 진이의 사람이니까, 나는 진이와 함께 있어야 하니까라고 바뀌지 않을 것 같은 의견에 도장을 찍었다. 하지만 나의 삶, 나는 무엇일까. 나는 어떤 생명일까 생각이 들었다. 충분했냐고 물어본다면 충분하지 않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후회는 하지 않더라도, 마음껏 즐기지는 못했다고, 내 시간을 남겨두고 오지 못한 곳들이 너무 많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나는 도망가고 싶었다. 진이의 곁일까, 아니면 나의 방일까?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진이도 이 문의 글을 읽었을 텐데, 나처럼 머뭇거렸을까 아니면 자신의 시간은 어떻게 되든 좋으니 그저 자신의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으로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을까? 그게 어떤 모양이었을지는 몰라도 진이는 자신의 남은 시간을 모두 버려둔 채로 이 문을 열고 들어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의 끝에는 새로운 의문이 들었다.
<진이가 과연 이 문의 뒤편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