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또에 당첨되면

등수별 구체적 계획

by Ubermensch



나는 로또를 거의 사지 않는다. 로또를 살 돈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로또 추첨이 생방송이 아닌 녹화방송이라는 점에 큰 의혹을 갖고 있다. 어차피 안 될 거, 그 돈으로 맛있는 거를 사 먹거나 예쁜 쓰레기를 사 모으는 게 더 낫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리고 나는 지갑도 현금도 들고 다니지 않기 때문에 우연히 지나가다 로또 명당을 발견한다 한들 로또를 살 수 없다. 그런 내게 얼마 전 특별한 현금이 생겼다. 황송하게도 아무런 출간 경험이 없는 나에게 실제 출판 및 방송 경력까지 있는 어떤 유명 작가님들이 협업 목적으로 만남을 간곡히 여러 차례 제안하셨다. 처음에는 회피하다가, 내 몹시 좁고 폐쇄적인 세계를 한걸음이라도 넓혀보는 기회가 될 수 있겠다 싶어, 한 번쯤 용기 내 응해보기로 했다. 그분들은 도를 달리하는 먼 지방에서부터 나를 만나러 와주셨다.


한 작가님은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작<1Q84>의 아오마메 같다며 손때 묻은 책 한 권을 선물해 주셨다. 바빠서 아직 못 읽어봤지만 조만간 읽고 후기를 꼭 전해드릴 예정이다. 그분들께서는 점심 식사를 함께하자고 몇 차례 권유하셨지만 나는 낯선 사람과 밥을 잘 먹지 못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그분들은 인터뷰비라며 예쁜 봉투에 2만 원을 담아 건네주셨고, 나는 그 2만 원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몇 주 동안 가방에 넣어 가지고 다니다가, 부산 태종대 주차장에서 주차비 1천5백 원을 쓰고, 1만 8천5백 원이 남았다. 그리고 오늘 그 돈으로 로또를 사기로 마음먹었다.


부장님의 친구 제미나이에게 로또에 당첨되면 세금을 제외한 금액이 얼마나 되는지 물어봤다. 그 친구는 1등 15-20억 원, 2등 4천-6천만 원, 3등 140-200만 원, 4등 5만 원, 5등 5천 원이라고 친절하게 알려줬다. 즉시 계획을 세웠다 1등이 될 리가 없으므로 굳이 상상력을 가동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진 못하겠다. 대충 내 주담대와 회사 마통을 갚고, 지금처럼 왕복 3시간 걸리며 출퇴근하지 않을 수 있는 회사에 가까운 집을 새로 장만하고, 생명이 다해가는 뽀동이를 놓아주고 내 꿈의 그랜저 하이브리드를 한대 뽑고, 생활비와 학비와 대출금 때문에 도전하지 못해 평생 마음에 깊은 한으로 맺혀있는 로스쿨에 지원할 거다. 2등이 되면 곧 망할 회사 마통을 갚으면 땡이다. 그래도 빚이 더 남는데 그건 새로운 기관에서 이어줄지, 나를 거리로 내몰지는 모르겠다. 4등이나 5등이면 혼자 맛있는 거 사 먹으려고 한다.


내가 제일 되고 싶은 건 3등인데, 만약 로또 3등이 된다면 팬미팅을 열 계획이다. 글을 쓴 지 현 두 달 시점 내 구독자수는 854명이다. 나는 알람이 뜨는 것도 귀찮고, 예의나 형식에 입각한 맞구독도 안 하기 때문에 나를 구독해 주시는 귀한 분들은 상호 답례 형식이 아닌 오로지 내 글을 보기 위한 순수 독자임이 보증된 것으로서, 그중 일부 감사한 분들께서는 내 팬임을 자처하시기도 한다. 덧글이나 메일이나 응원으로 따뜻한 메시지를 전해주시기도 하고, 나 대신 슬퍼하고 기뻐해주시기도 하며, 내 글에 공감하고 위안을 얻어가시는 소중한 분들께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 마음이 항상 있다.


팬미팅이라는 말은 다시 보니 좀 건방진 것 같다. 내가 뭐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그냥 감사한 분들께 식사를 대접하는 자리를 만들 계획으로 정정하기로 한다. 물론 나는 낯을 많이 가리기 때문에 그 자리는 단순 식사 자리가 아닌 강요의 술자리가 될 거다. 나는 술에 취하면 강요를 즐기는 이상한 주사가 있다. 팬미팅이랍시고 모집을 하면 내 구독자 854명 중 대략 8명 정도 참석할 것으로 예상된다. 14명이나. 그러면 3등 당첨 금액인 140-200만 원을 탈탈 털어서 즐겁고 맛있고 혼미한 저녁 자리를 만들어야지. 취하면 내 극심한 낯가림은 사라지니까 괜찮다. 혹시 그 8명에서 14명 중 내 눈에 띄는 어떤 멋진 사람이 있다면, 나는 술의 기운을 빌어 조심스럽게 제안을 해보려고 한다.

저, 혹시 제 농노가 되어주시겠어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아무리 내 글을 평소에 좋게 읽고, 응원하고, 로또에 당첨됐다며 꼴에 팬미팅까지 연다고 하길래 참석했더니, 난데없이 농노가 되어달라고 하면 거절을 할 것이 분명하다. 술에 취한 나는 평소와 달리 박력이 생기기 때문에 그 거절에 자존심과 마음이 상해서 당장 그쪽 상을 엎고 자리를 파할 거다. 내 농노 제안을 거절한 그 멋진 사람에게 그쪽이 드신 술값은 직접 계산하고 가세요. 하고 패악을 부린 후 안주로 나온 뻥튀기 한 조각을 가슴팍에 던질 테다. 그리고 나머지 선량한 팬 7-13명에게 내가 부린 추태를 사과한 다음 2차를 가서 더 재미있게 놀 계획이다. 물론 그들이 나를 따라 2차까지 가준다면 말이다.


얼른 로또를 사러 가야지.





* 오기를 발견해서 수정하려다가 실수로 삭제를 눌러서 다시 올립니다. 소중한 독자님들께서 하트를 100개쯤 눌러주셨고 정말 감사한 내용의 덧글이 30개쯤 달렸던 글인데 허망하게 날려먹어서 화가 머리끝까지 나고 제 손가락을 싹둑싹둑 펜치로 잘라버리고 싶지만 너무 아플 테니까 제 자신을 용서하기로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