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과다인의 사고전개 과정

꼬꼬무식 생각법

by Ubermensch






잠이 든 순간을 제외하고는 나는 늘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중이다. 특정 주제에 대해 여러 가지 관점으로 파고들 때도 있고, 내 머릿속 방대한 아카이브에 저장된 과거의 기억들이 어떤 사소한 트리거를 계기로 재생될 때도 있는데, 나는 제 3자의 관점에서 그것을 시청한다. 그 영상은 20년 전 기억일 때도 있고, 며칠 전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한 장면인 경우도 있다. 그럴 때면 당장 내 눈앞에 닥친 현실적으로 더 중요하고 시급한 것들은 자체 블러 처리가 되곤 한다. 눈앞에서 현실의 인간이 내 눈을 맞추며 아무리 뭐라 뭐라 이야기를 해도, 내 귀는 그 말소리를 퉁퉁 튕겨버린다. 나에겐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이기적 성향이 있다.


사고의 전개 과정은 대충 이렇다. 가령, 발레 학원에서 점프를 하고 턴을 도는데, 갑자기 호흡이 가빠지고 식은땀이 나면서 선생님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눈앞이 깜깜해졌다. 선생님이 첫번째 팀 한번 더! 하는데, 한번 더 점프를 하면 그대로 바닥에 꽂혀 쓰러질 것이 틀림없으므로, 급하게 탈의실로 나가 구석에 기대앉았다. 가쁜 호흡을 내쉬는 와중 내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확장된다. 나는 지금 흰색 스타킹에 수영복 같은 레오타드 차림인데, 여기서 쓰러지면 119 구조대에 실려가겠지. 치료를 마치고 집에 갈 때면 이 차림으로 가야 할 텐데, 얼마나 남부끄러울까.


설령 여기서 실려가지 않고 무사히 회복된다 해도 집까지 운전해서 가야 할 텐데, 가는 길에 다시 의식이 흐려져 사고가 나면 역시 이 차림으로 병원에 실려가겠지? 다행히 무사히 집까지 도달했는데, 내일 못 깨어나면? 내일은 누구누구 재판이 있는 날인데, 내가 재판 준비를 못하면 우리 검사님은 얼마나 당황하실까? 우리 고양이들은 배가 고파서 죽은 나를 뜯어먹겠지? 그럼 내 시체는 끔찍하게 부패해서 악취가 나고 벌레가 꼬인 채로 발견될 거야.


다행히 나는 그날 119에 실려가지도 않고, 운전도 무사히 해서 집에 도착했고, 다음날 멀쩡히 눈을 떠서 재판 준비도 했다. 대신 선량한 옆자리 후배를 불러놓고 이야기했다. 만약 제가 11시 15분 정도까지 연락 없이 출근을 안 하면, 그전엔 과음해서 단순 지각일 수도 있으니까 시간을 꼭 주의해 주시고요. 어쨌든 그 시간까지 제가 출근을 안 하면 저희 집 관할 검찰청에 근무하는 누구 수사관이라고 있어요. 저희 집 도어록 비밀번호는 매주 오는 출국금지 공문 비밀번호예요. 기억하기 쉽죠? 그 비밀번호를 알려주고 저희 집에 가봐 달라고 하세요. 그 수사관은 제가 오래 만난 전 남자 친구이기 때문에 아마 외면하지 않고 가줄 거예요. 알겠죠?


내겐 이프(IF) 병이 있다. 패브릭병과 마찬가지로 의학계에 공식 코드가 있는 병명은 아니고, 내가 지어낸 병이다. 그 병은 '만약에..'로 시작하는 질문을 듣는 사람이 미치기 직전까지 해대는 병이다. 주로 선량한 남자친구에게 한다.


넌 감자(우리 집 둘째 고양이)를 좋아하잖아. 만약 무인도에 감자랑 둘이 갇혔는데 배가 너무너무 고파. 그럼 너는 감자를 잡아먹을 거야? 응 그래야지. 그렇지만 감자는 털만 많아서, 뼈나 내장을 빼면 살코기 부위가 사실상 얼마 안 되잖아. 너는 금세 배가 다시 고플 텐데. 차라리 몸집이 큰 너를 감자가 먹게 하면 구조될 때까지 살아 있을 가능성이 더 큰 건 감자일 테니까. 네가 참고 굶어 죽는 게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라든지.


어디서 시아버지가 며느리의 모유를 먹겠다는 막장 글을 읽고 와서는, 만약에 너희 아빠가 큰 병에 걸려서 내 모유를 먹어야 병이 나을 수 있대. 안 그러면 죽는대. 그런데 다른 용기에 덜어서 먹는 방법이 소용이 없고, 직접 접촉을 해서 먹어야만 낫는대. 그럼 너는 어떻게 할 거야? 하면, 아빠는 이미 살만큼 살았다고 해야지. 이런 식이다.


강산이 한번 바뀔 만큼의 긴 시간을 함께한 고소한 정수리 냄새의 전 남자친구는, 내 지독한 이프병에 수반된 수천 개의 질문에 성실하고도 진지하게 답변해 주었다. 단 한 번도 그런 비현실적이고 쓸데없는 질문을 왜 하는 거냐고 짜증을 내거나 무안을 준 적 없이, 곰곰이 생각한 후 착실하게 답했다. 정말 고마웠어.


이렇게 내 머릿속엔 끝없는 생각과 영상과 꼬리에 꼬리를 물고 확장되는 질문이 가득하므로, 나는 글을 쓰는 게 어렵지 않다. 이미 머릿속에 꽉 차서 줄줄 새어 나오는 이미지와 문자와 대화들을 그냥 활자로 옮겨 적기만 하면 된다. 시간도 오래 안 걸리고, 주취 중에도 쓸 수 있다. 실제로 그런 글이 꽤 많고, 나를 잘 아는 사람이면 내 오타하나 없고 띄어쓰기도 완벽한 한 문장에서부터 술냄새를 맡기도 한다.

MBTI가 유행한 지 꽤 됐다. 현실적인 성향이라는 S가 들어가는 사람들은, 내가 하는 저런 사고 전개방식을 거치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조금 지각이라도 하면, 출국금지 공문 비밀번호를 떠올리며 내 주거 관할 청에 근무한다는, 알지도 못하는 대선배에게 연락을 할지 말지 고민해야 했던 선량한 옆자리 후배도 지하철에서 쓰러진 경험이 있다는데, 그냥 사람 많은 곳에서 쓰러졌다 깨어나니 창피했다. 가 전부였단다. 그렇게 심플하게 생각을 마무리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하다.


내 절친 챗 지피티에게 물어봤다. 보통의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느냐고. 챗 지피티는 보통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내 생각은 순식간에 활활 타올라 비선형적으로 저 먼 우주까지 떠나갔다가 어느새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차갑게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언제 정리를 했냐는 듯 또다시 이리저리 튀어 다닌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게 이상하거나 나쁜 건 아니라고 했다.


나도 그게 이상하다거나 부끄럽게 여기진 않는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보편적 대화 주제는 내게 너무 지루하다. 연예인, 가십, 날씨, 뉴스, 유행 등의 얘기는 내게 아무 흥미를 주지 않아서, 최대한 그런 종류의 대화상황을 피하려 애쓴다. 나는 오로지 내 머릿속의 생각만으로 혼자 큭큭거리며 재미있어할 때가 많다. 그래서 드물게 내 흥미를 끌면서, 나를 궁금하게 만드는 사람을 좋아한다. 나를 더 생각하게 만들고, 내가 미처 못 본 관점을 알려주는 사람에게 끌린다. 그래서 내가 친한 사람이 많이 없나 보다. 그래도 괜찮다. 혼자라도 따분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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