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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대 노인이 살인을 저지른 이유

순백의 피해자 이미지에 관한 고찰

by Ubermensch




우리에게는 피해자와 가해자에 대한 어떤 특정한 이미지가 있다. 피해자는 완전무결하고 가해자는 극악무도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이다. 범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분명 어떤 가해행위가 전제되어야 하고, 그에 따른 피해가 발생해야 하기 때문에 이 이미지는 일면 타당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실제 수사기관에서 사건의 전말을 면밀히 보고, 피해자와 가해자를 대면해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경우가 왕왕 있어 심란해질 때가 있다.


성폭력 범죄 위주의 사건을 주로 전담했던 터라, 살인사건을 접해본 경우는 흔치 않았다. 그중 80대 할아버지가 한 아주머니를 살해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 사건을 접한 첫인상은 와 이 할아버지 타고난 킬러 감각이 있네, 하는 것이었다. 아무 전과가 없던 평범한 노인이었는데, 딱 칼을 두 번 휘둘러서 아주머니의 생명을 빼앗았다. 그 자리에는 필사적으로 상황을 막으려던 거구의 젊은 아들도 있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사실 사람의 생명을 앗아간다는 것은 그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내 기억으로 이 사건은 징역 20년 이상을 구형했고 그 정도에 상응하는 형이 선고되었으며, 이 선고형도 과경하다고 검찰에서 항소했다. 눈앞에서 어머니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이를 막으려다 본인조차도 크게 다친 아들을 증인으로 소환하기 위해 통화를 하면서 그 참담한 심정이 절절히 느껴져서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내가 이 사건이 더 기억에 남았던 이유는 특히 가해자 측의 안타까운 사정 때문이었다.


노인은 피해자에게 수십억을 투자했다가 사기를 당했는데, 피해자는 재산 명의를 다른 가족에게 돌려놓고 호의호식하며 노인에게 돈을 갚지 않았다. 이때문에 노인은 한 달에 월 이자만 수천만 원씩 내야 하는 궁핍한 상황에 처했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으며, 돈을 받아보겠다고 아주머니의 집에 찾아가자 스토킹과 협박으로 신고를 당해 오히려 벌금까지 내게 되었다.


사람을 믿고 투자를 했다가 돈도 잃고, 가정도 망가지고, 전과까지 생긴 것이다. 결국 그 돈을 돌려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노인은 칼을 들고 찾아가서 아주머니를 찔러 죽였고, 그 길로 경찰서에 가서 사람을 죽였다고 자수했다. 이미 당시 나이가 80대이고 십 수년의 형이 선고되었으니 아마 노인의 남은 생은 교도소에서 마감할 것이다. 그가 살인을 결심했을 때, 스스로도 그 결말을 짐작했을 것임에도, 사람을 믿고 배신당해 인생이 망가진 노인에게 남은 선택이란 그뿐이었던 것 같다.


법정에는 노인의 아내와 자식들이 찾아왔다. 평범했던 남편이, 아버지가, 살인자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이 사건의 비극적인 부분은 피해자에게 가해자의 얼굴이, 가해자에게 피해자의 얼굴이 공존한다는 점에 있다. 살해당한 아주머니의 자식들은 어머니가 왜 느닷없이 살해당했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 나도 알려주지 않았다. 노인의 아내와 자식들은 살인을 저지른 남편과 아버지의 형량을 줄이기 위해, 없는 돈을 모아 합의금을 마련해 용서를 구했다.


피해자라고 해서 꼭 순수하게 완전무결하지는 않다. 가해자라고 해서 모두가 다 사이코패스처럼 재미로 사람을 해치는 것은 아니다. AI가 판사의 판결을 대체하는 시대가 올 지도 모른다고 하는데, 잔혹한 범죄 행위 이면에 자리한 인간성을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 노인을 향해 살인자라고, 쉽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나는 증거 영상 CCTV 속의, 아주머니가 살던 그 호화로운 아파트를 여러 번 찾아 서성이던 노인의 체념 어린 뒷모습이 아직도 종종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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