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몸에 대한 별 의미 없는 환상에 대한 답변
내 몸에 대한 언급이란, 마치 "좋은 아침이에요." "식사는 하셨어요?" 같은 안부 인사처럼 흔하게 들려온다. 뭐 바비인형 같다, 몸매 천재다, 아이돌 같다 등등. 남녀노소 불문 때와 장소 무관하게, 사람들은 내게 못 참겠다는 듯, "저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지만.."으로 시작하며 칭찬을 한다.
발레 학원에 가면 발레리나 선생님들조차 내게 관리 비법을 묻고, 한평생 몸매에 관한 한 사람들의 찬사를 차고 넘치게 받아온 터라 그런 주제에 참 익숙하다. 사실의 적시에 대해 굳이 부정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고, 사회적 겸양을 그리 중시하지 않는 편이라 그럴 때 나는 특별히 환호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아 네 뭐, 감사합니다." 정도 답한다.
입사 전 헬스장 인포데스크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에, 회원님들이 자주 커피나 간식거리를 사다 주곤 했다. 한 번은 아주머니들이 몸매 관리 비법을 물어보길래, 딱히 운동이랄지 식단이랄지 하는 게 없어서 답변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음.. 타고남?"이라고 대답했더니 다음날부터 그들이 사다 주던 간식이 끊겼다. 또 발레나 필라테스를 하면 나 같은 몸매가 되냐는 해맑은 질문에는, 그렇다기보다는 나 같은 몸을 가진 사람들이 발레나 필라테스를 하는 거라고 대답했다. 내가 왜 친구가 별로 없는지 잘 알고 있다. 아직 남아준 친구들아 고마워!
그래도 발레 학원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발레복이 예쁘다며 정보를 알려달라고 하면, '레오타드는 중국 쇼핑몰에서 싸게 샀고 그렇게 특별한 디자인은 아닌데, 내가 입어서 예뻐 보이는 거야.' 라는 말은 꾹 참고 링크를 알려줄 정도의 사회성은 다행히 갖췄다. 그 정도면 됐지 싶다.
집안 내력 자체가 잘 안 찌는 체질이기도 하고, 아주 예민한 성격에, 운동을 좋아해서 인생의 대부분을 저체중으로 살았다. 늘 너무 말랐다, 병 있냐는 말을 많이 듣기도 했는데, 육체적으론 건강하다. 서른 초반이 지나고서는 매일 폭음 폭식을 하면서 표준체중 언저리까지 살이 오른 적도 있지만 운동 덕에 탄탄하고 보기 좋은 몸이었다.
요 몇 달간 살이 꽤 많이 급격하게 빠졌는데, 사실 그 정도가 내 한평생 평균 몸무게이긴 하지만 단기간의 변화라 그런지 주변 반응이 요란했다. 사실은 계기가 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살이 빠졌고, 이후에 정신과를 찾게 됐고, 약을 먹다 보니 식욕이 더 줄어들게 됐다.
전에 나랑 막역하게 지내던 남자 동기는 내 유일한 장점이 잘 먹는 거라고 했다. 그거 말고 다른 장점이 더 있지 않나? 해도 단호히 그뿐이라고 했다. 이십 대 까지만 해도 밥을 두 공기씩 먹었다. 밥 한 공기 더 주세요, 하기에는 좀 부끄러워서 남자 동기들이 대신 시켜주곤 했다.
몸은 말라도 항상 얼굴 살은 통통한 게 콤플렉스였다. 정수리에서 고소한 견과류 냄새를 풍기던 전 남자친구는 내 얼굴이 빵떡이다, 짱구얼굴 같다며 내 볼살을 양손으로 그러모아 놀리곤 했는데, 그 싫던 젖살도 최근에 쪽 빠졌다. 역시 최고의 다이어트 방법은 마음고생인 듯하다.
이틀에 한번 정도 부장실 실무관님이 다이어트를 하냐고 묻는다. 관리 많이 하지? 하고. 그런 게 정말 아니라서 나는 늘 그렇듯 정직하게 아니라고 대답한다. 야근을 많이 해서 힘들어서 그래요. 술을 줄여서 그런가 봐요. 새벽 폭식을 끊어서 그래요. 매번 진실한 이유를 대도 계속 물어본다.
다이어트를 하면 한다고 할 텐데. 나는 거짓말이나 빈말을 안 하는데. 보다 직접적인 이유인, 아 제가 사는 낙이 없어서 유일한 장점이라는 먹는 것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습니다. 정신과 약 부작용으로 공교롭게 식욕 감퇴가 있어요. 안 먹어도 배가 안 고픕니다. 아무 욕구가 안생겨서 그렇습니다. 저랑 몸과 영혼을 바꿔서 살아보시겠어요, 제안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사실 가장 쾌활하고 행복했던 시절은 놀림받던 빵떡이던 때다. 얼굴에도 삶에도 윤기가 자르르 흐르던. 뼈마름 특유의 분위기가 뭔지 안다. 특히 어린 여자들이 추구하는 가녀리고 가냘픈 선. 여자 기성복 사이즈 중 가장 작은 사이즈를 입는데도 요즘은 그게 헐렁해서 핀으로 고정해서 다닌다.
나는 그게 예쁜지 잘 모르겠다. 여자들의 부러움을 사긴 하지만 실루엣 자체가 병약하고 청승맞은 느낌을 준다. 실제로 요즘은 병원에 갈 때마다 약 가짓수와 용량이 늘고 있다. 몸이 아파도 웬만해서는 약에 의존하기 싫어 정신력으로 버티던 이상한 곤조가 있었는데, 정신이 몸을 휘발시키는 지금의 아이러니한 상황은 생각지도 못했다.
요즘은 특별히 절절하게 우울하거나 힘들지 않지만 딱히 신나거나 즐거울 일이 없어서, 굳이 안 그래도 번잡한 세상에 내 질량을 몇 킬로그램 더 늘릴 유인을 찾지 못하고 있는 상태랄까. 뭐 지금 당장은 그렇다. 시간이 좀 지나면 몸도 마음도 조금 더 통통해질 수 있을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