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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틴(routine)의 안정

짬뽕만 먹고 하늘색 옷만 입어

by Ubermensch




루틴(routine)은 말 그대로 반복적으로 하는 일상적 행동 패턴을 뜻한다. 습관(habit)과 비슷하지만, 습관이 무의식적으로 자동 실행되는 행위라면, 루틴은 의도적으로 짜인 일련의 행동 흐름이다. 자기만의 구조화된 생활 리듬을 만들어 주는 틀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국문학과임에도 철학과 강의를 더 많이 청강했던 나는 니체와 칸트를 가장 좋아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칸트가 산책하며 지나가는 걸 보고 시계를 맞췄다고 할 정도로 칸트는 정확하게, 그리고 오랫동안 오후 3시 산책 루틴을 지켰다.


나는 야근을 하는 날이면 꼭 짬뽕을 시킨다. 야근을 많이 하는 시기에는 주 4일 연속 짬뽕을 먹기도 한다. 월 특근매식 장부에는 내 이름과 짬뽕이 한 달 내내 빼곡히 적혀 있고, 급기야 그 중국집에 전화를 걸면, 전화를 받자마자 '여보세요'대신 '고추짬뽕 반찬 없이 보내드릴게요~'라며 미처 내가 말할 틈을 주지도 않는다. 오늘은 다른 메뉴가 먹고 싶을 수도 있지 않겠냐고 따질 생각도 잠깐 들 때가 있는데, 고추짬뽕을 반찬 없이 먹고 싶은 게 맞아서, 별 수 없이 네 감사합니다, 하고 끊을 수밖에 없다. 국물이 튈까 봐 우비를 입고 짬뽕을 먹는다. 그리고 내 자리가 아닌 내 전용 애착 남의 자리에 가서 먹는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무실 사람들은 한 두 마디씩 하지만, 그 루틴을 꾸준히 잘 지켜내 왔다.


또 나는 하늘색을 좋아하기도 하고 피부톤에 잘 받기도 해서, 좀 못생겨 보이는 날엔 하늘색 옷을 입으면 한결 보완이 되는데, 그러다 보니 하늘색 옷을 많이 사게 되고, 아침에 옷을 고를 땐 아무래도 확률적으로 하늘색 옷을 고를 경우의 수가 많으므로, 결국 주 4일 정도는 하늘색 옷을 입고 만다.


아침에 눈을 뜨면 무조건 커피머신에서 에스프레소 투샷을 추출한다. 사계절 무관하게 큰 얼음을 세 덩이 넣은 뒤, 물을 텀블러 2/3만큼 담고 에스프레소를 부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만든다. 그리고 갓 깨어난 빈 속에 꿀꺽꿀꺽 부으며 더 자고 싶은 마음을 차갑게 깨우고 출근 준비를 한다.

야근할 때 먹을 수 있는 메뉴의 선택지는 백 가지도 넘고, 고를 수 있는 옷 색깔도 수십 가지고, 아침에 먹거나 마실거리도 다양한 걸 안다. 그렇지만 짬뽕, 하늘색 옷, 에스프레소 투샷이 들어간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십 수년 째 매번 반복해서 선택하고 있다. 명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그렇게 선택하게 된다. 그 밖에도 왜인지 얼굴이 더 예뻐 보이는 특정 디자인의 손거울을 고등학생 때부터 서른 중반인 지금까지 쓴다. 잃어버리거나 깨트리면 어떻게든 온 사방데 수소문해서 같은 제품을 구해서 쓰고, 9년째 같은 인형을 안고 자고, 14년째 같은 머리스타일을 유지하고, 9년간 같은 남자와 만났다 헤어졌다 반복했다.


만나는 사람만 만나고, 먹는 것만 먹고, 보는 것만 보고, 듣는 것만 듣고. 그걸 하염없이 반복해서 선택하는 이상한 나만의 규칙. 그게 꼭 최선이라고 볼 수도 없고 명백하게 합리적인 것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오랫동안 굳어져서, 그게 아니면 뭔가 허전하고 불편해지는 이상한 상태가 되는 거다.


루틴의 장점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뇌의 에너지 절약이다. 의사결정 과정의 피로를 줄여 준다. 선택에는 포기한 것에 대한 기회비용-후회, 아쉬움, 익숙한 것에 대한 갈망 등이 따른다. 선택을 위해서는 이런저런 경우의 수를 가정하며 상상하고 그 결과를 예측하는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한데, 루틴대로 하면 그런 소모를 거치지 않아도 돼서 무척 편리하다.


두 번째는 안정감과 예측 가능성. 루틴을 따르면 불확실성을 줄여 정서적 안정이 가능하다. 이미 수도 없이 선택해서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종류의 만족을 딱 이미 알고 있는 정도만큼 얻을 수 있음이 보장된다. 예상을 뛰어넘는 행복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실망이나 실패할 일은 없다는 확신. 이건 몹시 안전한 일이어서 굉장한 안정감을 준다.




이 고집스러운 루틴의 반복이 폐쇄적일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인정한다. 영역의 확장은 모험을, 모험은 실패의 위험을 수반하므로. 안전하고 익숙한 작은 루틴세계에 꼭꼭 숨어서 나만의 소꿉놀이를 아주 오랜 기간 동안 하게 된 거였다. 언젠가 이 루틴을 벗어나 어떤 확장이나 변주가 필요할 날이 올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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