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유전자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과는 무관한

by Ubermensch







언젠가 고소한 정수리는 내게 말했다. 넌 정말 너밖에 모르는 애야, 라고. 특별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맞는 말이라서.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는 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몹시 중요한 태도다.


리처드 도킨스는 그의 저서『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에서 생물학적 진화의 기본 단위는 유전자이며, 개체와 종이 아니라 유전자가 자기 복제를 극대화하기 위해 전략을 취한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유전자는 이기적이지만 개체 수준에서는 협력과 이타성을 보이기도 하는데, 이 이타성도 결국은 유전자 복제를 위한 전략이고, 개체는 유전자를 전달하기 위한 생존 기계이며, 자연선택은 종 전체의 이익보다는 유전자 복제의 성공을 중심으로 작동한다는 독창적인 관점으로, 이 책은 한때 생명과학 분야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나는 유전자 자체가 자기 복제를 위해 개체를 조종할 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보진 않는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내가 가장 가치가 높았을 어린 시절, 나에게 구애하던 남자 중 가장 좋은 조건을 가진 남자를 선택해 가장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유전자를 복제했을 테니까. 사실 나는 출산도 영 무섭다. 출산의 적나라한 과정과 그 전후 여성 신체의 변화에 대해 유경험자를 통해 자세히 듣고 난 이후, 아무래도 내 예쁘고 소중한 몸을 망가트릴 자신이 생기지 않기에, 어느 날 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나는 애 딸린 남자랑 결혼하는 게 좋겠어. 자기 애를 홀로 키우는 남자라면 분명 책임감도 강할 거고, 내가 선택한 남자를 닮았으니까 당연히 애도 예쁘겠지. 나는 그 애를 정말 잘 키울 거야. 했다가 엄마한테 등짝을 맞았다.


나는 엄마 아빠의 좋은 유전자만 몰빵해서 물려받았다. 엄마의 눈웃음과 높은 코, 아빠의 흰 피부와 비율 좋은 뼈대와 운동능력, 엄마의 건강한 체질과 가리는 것 없는 식성, 어느 쪽인진 모르겠지만 높은 지능, 엄마의 강인함 등등. 반대로 내 남동생은 그 밖의 나머지 부분들을 물려받았다. 어릴 때 엄마와 아빠는 서로 내가 본인을 닮았다고 실랑이를 벌이던 기억이 있다. 동생을 두고는 그런 적이 없다. 동생을 비하할 의도는 없지만 키도 작고, 공부도 못하고, 연애도 못하고, 운동도 못하고, 더 나열하려니 정말 비하 같아서 그만하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동생의 기를 죽이거나 비교해서 깎아내린 적은 없다. 어릴 때 동생을 많이 때리기도 했고, 피아노 의자에 앉아있던 애를 밀쳐서 머리부터 떨어진 적이 있었는데, 그래서 머리가 나빠진 게 아닌가 하는 죄책감이 조금 있긴 하다. 동생은 어느 날 나와 한바탕 싸움을 한 뒤, 나 때문에 자기가 한평생 구석에서 살았다고 했다. 참 의아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외가에서 자라는 동안 우리는 엄청난 남녀 차별을 당하며 나는 콩쥐나 다름없이 컸는데 말이다.


그건 정말 사실이다. 뭘 하나라도 더 배우고 싶어 했던 나와 달리, 아무 학업의지가 없던 동생은 마치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비싼 종합반에 보내주고, 나는 학습지나 하고. 동생이 과외를 받을 때, 나는 돈을 벌기 위해 과외를 하러 다녔다. 동생이 미술 학원을 갔을 때는, 내가 잘 다니던 피아노 학원을 끊게 됐다. 성인이 되고 가끔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가 각자의 성장 가능성을 판단하고 선택과 집중을 해서 나한테 투자를 더 해줬더라면, 내가 잘돼서 우리 집안을 일으켰을 텐데. 첫 번째 여자 대통령이 세상에 나오기도 전부터, 이다음에 나는 두 번째 여자 대통령이 되겠다고 마음먹고 반 친구들에게 공표했을 만큼 포부가 컸던 내가 지금 이렇게 보잘것없이 살고 있는 게 너무 슬퍼서 한 소리다.


어쨌든 둘 다 자식이므로, 부모 입장에서는 오직 경제성의 논리만으로 자녀를 양육할 수는 없을 테고, 하나를 아예 놓아버릴 수는 없으니 욕심이 많고 알아서 잘하는 애는 알아서 하게 두고, 유약하고 어리고 사납지 않은 자식에게도 어느 정도 발판을 마련해 주고자 한 마음은 이해한다.


고소한 정수리는 얼마 전 술이라도 취한 건지 느닷없이 내게 연락해 망언을 해댔다. 아기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며, 몸매가 좋아도 더 늦으면 아기를 못 만들 수도 있으니까 아기를 만들란다. 그게 무슨 말이냐, 남자친구도 없는데 갑자기 미혼모가 되라는 거냐니까, 아기부터 만들고 괜찮은 남자랑 결혼을 해도 된단다. 나에게는 돌봐줄 남자가 필요하단다. 지금 한 말을 사내 게시판에 올려 뭇매 좀 맞아볼래, 하니 꼬리를 내리고 사라져 버렸다.


이제 나도 나이가 많이 들었고, 주변 내 또래 친구들은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려 복작복작 잘 살고 있다. 나도 평생을 함께 할 만한 사람을 만나 결실을 맺지 못해서 그렇지, 비혼주의가 아니고 평범하게 사는 것이 어릴 적부터 간절했던 꿈이기 때문에 그렇게 알콩달콩 사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든다.

나는 리처드 도킨스와 다른 의미에서, 정말 직관적인 의미에서의 이기적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말 그대로 이기적이다. 맛있는 것도 내가 먹고 싶고, 좋은 건 내가 가지고 싶고, 내가 최고여야 직성이 풀린다. 하지만 마음껏 이기심을 부리려다 보면, 사회적으로 학습된 도덕성 때문인 건지, 칸트가 말한 내 마음속 별처럼 반짝이는 정언명령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남에게 해를 끼치는 정도의 이기심은 나로 하여금 어떤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내게 의미 있는 사람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 차라리 내가 더 괴로운 게 낫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에도 부당한 일을 겪는 선량한 사람을 보면 그 부당함을 일으킨 상대나 상황에 대한 분노가 막 치민다. 이런 감정들은 그저 복제만을 위해 개체를 조종하는 이기적 유전자의 영향력과는 무관해 보인다.


리처드 도킨스가 단순히 유전자의 복제 욕구를 수행하는 생존 기계로 폄하한 인간에게는, 인간 고유의 자유 의지가 있다. 본인의 삶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무궁무진한 선택을 할 수 있다. 그 각각의 선택에 대해 오롯이 책임을 지기만 하면 된다. 그 선택이 일반적인 기준과 방향에서 조금 거리가 있을 수도 있고, 그 결과가 보편적인 속도와 차이가 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각자의 의지에 의한 선택에 따른 것이므로, 그 책임을 어깨에 지고 묵묵히 본인의 갈 길을 걸어 나가면 될 뿐이다.




이전 03화선택과 집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