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정동진 독립 영화제
초여름에 무주산골영화제가 있다면, 한여름에는 정동진 독립영화제가 있다. 정동진 독립영화제는 매년 8월 첫째 주 강릉의 정동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리는 영화제다. "별이 지는 하늘, 영화가 뜨는 바다"라는 낭만적인 슬로건을 가지고 있다. 독립영화의 저변 확대를 위한 영화제인 만큼, 영화관에 걸리는 대형 상업 영화가 아닌, 독립영화만 상영을 한다.
밖에 있어도 여전히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한 여름의 밤, 불 꺼진 초등학교의 운동장에 돗자리를 펴고 영화 보는 시간이라니 생각만으로도 너무나 낭만적이어서 꼭 가보고 싶었던 영화제였다. 매년 가려고 할 때마다 정동진에는 숙소가 없었고, 강릉으로 가자니 8월 첫째 주는 피크 휴가철이어서 숙소의 가격이 매우 높았다. 올해에는 운이 좋게도 (휴가철을 감안했을 때) 적절한 가격으로 강릉 숙소를 잡을 수 있어 처음으로 정동진 독립 영화제에 다녀왔다.
바닷가에 영화를 보러 왔는데, 바다 수영을 안 할 수 없다. 올여름의 할 일은 물속에서 지내는 시간을 늘리는 일이기에, 강릉에 도착하자마자 호텔 체크인도 하지 않고 바로 바닷가로 직행했다.
내가 묵은 호텔 바로 앞의 강문해변은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았고 에메랄드 빛 바다가 매우 맑아서 좋았다. 수영을 할 수 있는 존은 아담한 규모로 정해져 있었지만 오히려 아늑하고 안전하게 느껴져서 좋았다. 모래사장에는 파라솔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파라솔과 돗자리를 대여해 앉은 후, 달궈진 몸을 식히기 위해 바닷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무더운 더위에도 바다는 차가웠다. 물속에서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가운 온도였다. 역시 인공적인 수영장과 달리 자연은 자신만의 온도를 유지하는구나를 느꼈다.
바닷물의 소금기를 잘 씻어낸 후, 영화를 보면서 먹을 닭강정을 포장해 정동진으로 달렸다. 정동진까지는 차로 30분 정도 걸렸다. 엄청나게 멀지도, 엄청나게 가깝지도 않은 거리였다. 정동 초등학교가 있는 곳은 정말 작고 귀여운 동네였다. 주차를 하고 언덕을 걸어 내려오면 마을의 풍경과 알록달록한 색의 정동 초등학교, 정동진 독립영화제의 현수막이 보인다. 자원봉사자들이 날려주시는 환영의 비눗방울을 터뜨리며 영화제로 입장한다. 낭만적인 환영에 금세 기분이 들뜬다.
운동장에는 영화 상영을 위한 큰 스크린이 걸려있고, 그 앞에 사람들은 색색의 돗자리를 펴고 옹기종기 앉아있다. 한편에서는 자원봉사자들이 모기를 쫓기 위한 쑥불을 피우고 있다. 여름의 해는 느릿느릿 지고, 어둑해지는 8시 즈음 영화는 시작된다. 느긋하고 따뜻한 여름의 풍경이다.
단편영화 모음 2 세션과, 장편영화 1 세션을 보고 왔는데 모두 따뜻하고 생각해 볼거리를 던지는 영화여서 좋았다. 가장 좋았던 영화 몇 편을 기록해 보자면, 이 세 영화가 기억에 오래 남는다.
<소년유랑>
- "내 몸을 신당이라고 생각하고, 삼시세끼 정성스레 요리해서 먹어."
"아무거나 먹고, 아무 데서나 잠들면 탈이 나겠지."
"문득 제일 중요한 게 정말 좋은 곳에서 푹 자고,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이 어떻게 보면 나를 돌볼 수 있는 제일 일차적인 방법 중에 하나라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만드셨다고 한다. 힙한 뮤직비디오 같기도 하고, 청량하면서도 서늘한 일본영화 같기도 한 영상미가 마음에 쏙 들었고 내레이션과 대사들이 좋았던 영화다. 나도 칼리 언니가 말한 것처럼 나를 잘 먹이고 잘 재우면서 지내야지, 맞아 저게 가장 쉬우면서 어려운 거지라고 생각했던 영화.
<마법이 돌아오는 날의 바다>
- 마법을 잃어버린 주인공이 자신의 마법을 되찾아보고자 하는 이야기. "내가 하고 싶은 일과 주변에서 해야 한다고 말하는 일이 다른 일이 많다. 하지만 내가 내 능력을 믿어보는 경험이 나쁘지 않았다는 것"을 공유하고 싶었다고 하셨다. 이전에 한지원 감독님이 작업하신 작품들 그리고 광고 콘텐츠가 인상 깊었던 터라 기대했는데 역시나 재미있었다. 전체적인 스토리는 조금 헷갈리는 부분도 있었지만, 내 능력을 믿어보라는 메시지가 와닿았던 작품이었다.
<지구 종말 vs 사랑>
-"나에게 사랑이 종말만큼이나 중요한 것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 종말과 사랑을 가장 중요한 화두로 품은 두 사람의 이야기"
글짓기 수업에서 한 조를 이루어 글을 쓰게 된 두 사람이 매우 다른 두 주제를 두고 대립하는 이야기. 그 무엇보다 다정과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은 나에게도 중요한 화두이기에 즐겁게 본 작품이다. 심지어 나는 지구 종말 또한 중요한 화두인 사람이라 대립하는 두 사람 중 어느 편에 서야 할지 내내 갈팡질팡했다. 나는 지구 종말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마음은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둘은 어쩌면 처음부터 이어져 있던 것일지도!
자신을 잘 챙기고, 내 능력을 믿고 용기를 내어보고, 종말보다 당장의 사랑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영화들 덕분에 마음이 풍요로워진 여름밤이었다. 한참 영화를 보다가 고개를 조금만 들어 하늘을 보면, 서울과 달리 별이 무수히 많은 여름 밤하늘이 보였다. 종종 반딧불이가 나타나기도 했고, 유성을 본 사람도 있다고 했다. 돗자리에 누워 별을 보다가, 다시 앉아 영화를 보다가, 주변의 관객들과 함께 깔깔 웃으며 감독님들의 이야기를 듣던 시간들 덕분에 이곳에서 본 영화가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보통의 영화제는 1~2시간 동안 영화를 보고 흩어지는 식인데, 정동진 영화제는 한 자리에서 4~5시간을 연달아 함께 반응하며 영화를 보니 주변 관객들과 내적 친밀감이 생겨 더 재미있게 느껴졌다. 인생 뭐 있나. 따뜻한 여름밤,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것 먹고 크게 웃으면서 영화 보고 돌아가는 길에 얘기하기. 그렇게 살면 행복한 인생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