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눈이 떠졌다. 깜깜한 밤 통나무집 숙소에 도착했던지라 우리가 잠든 이곳의 바깥 풍경이 너무 궁금했다.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 얼른 보고 싶은 마음에 눈 뜨자마자 아직 자고 있는 아이들이 깰까 조심조심 거실로 나가 앞문을 열어보았다.
차가우면서도 물기를 잔뜩 머금은 울긋불긋 낙엽들의 가을향이 훅 들어왔다. "후-"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공기를 느끼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아침 해가 아직 뜨기 전이라 어스름한 분위기였지만, 앞마당 나무들 너머 흐르고 있는 물소리가 고요한 숲 속을 가득 채워 주었다. 그때, 나무 테이블 위로 자태 고운 고양이 한 마리가 살포시 올라와 앉았다. ‘어머, 여기 고양이가 있네’ 신기한 마음에 그 한참을 바라보았다. 마치 이곳의 수호자처럼 고양이는 여유롭고 고고한 자세로 오래도록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플리트비체 숲 속에서 맞이한 아침은 시원한 공기 속에 나무와 흙내가 어우러져 있었고, 고양이 요정이 우리를 반겨주는 신비로운 시작이었다. 아직 하루가 시작되기 전 모든 것이 정지한 듯했던 통나무집에서의 아침은 한없이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오늘은 장시간 트래킹을 하는 날이다. 국립공원 안에 샌드위치를 파는 곳이 하나 있지만, 맛이 별로라는 평이 많아, 나는 한국에서 가져온 햇반과 스팸으로 하와이안 무스비를 쌌다. 달콤한 군것질거리와 전날 산 과일도 함께 넣고, 4~6시간이 걸린다는 트래킹에 만반의 준비를 마친 뒤, 일찌감치 짐을 챙겨 출발했다.
플르티브체를 방문하기 전, 우리는 두 가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첫 번째는 여름이 아니라서 초록빛 잎사귀들과 어우러진 투명하고 푸른 물이 아닐까 걱정이었고,
두 번째는 우리 가족에게 딱 맞는 트래킹 코스를 어떻게 선택할지 고민이었다.
첫 번째 고민에 대한 답은, 비록 플르티비체의 여름을 경험해 보지 못했지만 붉게 물든 숲과 푸른 물이 만들어낸 풍경이 모든 기대를 뛰어넘었다는 것이다. 극성수기 시즌이 아니었기에 입장이나 배를 타는 데에도 전혀 지체되지 않았고, 트래킹 중에도 많은 사람들에 치이지 않아 여유롭고 편안하게 자연을 만끽할 수 있었다.
두 번째 고민은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H코스를 선택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래서 가기 전에 다양한 코스를 조사해 봤는데, 많은 사람들이 H코스를 택하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아마도 "한 번 가는 여행, 언제 또 오겠어?" 하는 한국인 특유의 열정적인 마음이 반영된 선택이 아닐까 싶다. H코스는 플르티비체 국립공원의 주요 명소들을 빠짐없이 둘러볼 수 있는 코스로, 첫 방문이라면 굳이 짧은 코스를 선택할 이유가 없었다. 생각보다 힘들지 않게, 여유를 가지며 사진을 찍고, 자연을 즐기며 걸으면 금세 완주할 수 있었다. 또한, 한국에서의 시차를 고려해 대부분 이른 아침에 국립공원을 찾게 되는데, 이 선택은 정말 현명한 선택이다. 하지만 아침 일찍 방문할 경우, 호수에 운무가 끼거나 햇빛이 아직 충분히 밝지 않아 물빛이 푸르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했다.
이런 요소들까지 고려해 가볍게 산책하듯 국립공원에 들어가 폭포와 호수들을 구경하며 걷다가, 사람이 적은 시간대에 보트를 타고 건너가 마지막 하이라이트인 Kazjak호수와 veliki 폭포가 후반부에 나오는 H코스를 선택하는 것이다. 최적의 햇빛 아래에서 반사되는 투명하고 맑은 물빛을 감상할 수 있는 이 코스는 부족함이 없었다.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을 만큼 맑고 깨끗한 푸른 물로 유명하다. 이곳의 물빛은 단순히 예쁘다거나 깨끗하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플리트비체의 물은 과거 해양 환경에서 형성된 독특한 지질학적 특성 덕분에 이렇게 푸른색을 띠게 되었다고 한다. 석회질 물질, 예를 들어 조개껍데기나 물고기 뼈 같은 것이 수천 년 동안 퇴적되어 석회암을 만들었고, 그 석회질 입자들이 빛을 반사하고 굴절시키면서 우리가 보는 푸른색과 청록색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특별한 물빛의 비밀은 물속에서 빛이 어떻게 굴절되느냐에 있는데, 햇빛이 물속으로 들어가면서 각도에 따라 물의 색깔이 변해 깨끗하고 투명할수록 빛이 반사되어 푸른색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원리다.
그래서 플리트비체의 물은 시간대에 따라서도 달리 보이고, 계절에 따라서도 그 깊이와 아름다움이 다르게 보이는 것 같다.
영화 아바타의 감독 제임스 카메론이 플리트비체의 환상적인 자연경관에서 영감을 받아 판도라행성을 만들었다는데, 그래서인지 이곳을 산책하는 동안 우리가 마치 판도라 행성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귀를 기울이며 걸을 때마다 시원하게 떨어지는 폭포를 마주할 수 있었고, 너무나 맑고 깨끗해 물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호수를 만날 수 있었다.
가을을 잔뜩 머금은 나뭇잎들이 주황빛, 붉은빛, 노랑빛으로 물들어 흩날리는 모습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아름다운 영화였다. 긴 산책을 하며 마음껏 느끼고 숨을 깊게 들이 쉬었다. 이 기분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