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쟤는 도대체 누굴 닮아 저러니?”
답답함 섞인 한숨과 함께, 많은 부모들이 한 번쯤 내뱉는 말이다.
“누굴 닮아 저렇게 까탈스러울까?”
“난 안 그랬는데, 왜 이렇게 예민하지?”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고 덤벙대? 또 다쳤어?”
“도대체 몇 번째야, 물건 좀 제대로 챙겨!”
이런 말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를 향해 쏟아진다.
하지만 그 속엔 사실, ‘왜 내 아이는 나랑 이렇게도 다를까? 도저히 이해가 안 되네!’ 하는 혼란과 답답한 마음이 숨어 있다.
부모는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걱정하고, 걱정하기 때문에 다그치며 잔소리를 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아이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점점 마음이 위축된다.
정말 아이가 이상하기라도 한 걸까?
전혀 아니다. 엄마의 관점에서 아이의 다름이 낯설 뿐, 엄마와 아이가 성격과 기질이 다른 것뿐이다.
심리학자 토머스(Thomas)와 체스(Chess)의 고전적인 연구에 따르면, 이런 차이는 태어날 때부터 존재하는 기질(Temperament)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이 연구는 아이들의 기질이 태어날 때부터 일정하게 존재하며, 부모의 반응 방식이나 양육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발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연구는 “Goodness-of-Fit (적합성)” 개념을 강조는 데, 부모의 양육 방식이 아이의 기질과 잘 맞을 때 아이는 더 안정되고 건강한 발달을 한다고 말한다.
부모와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지만, 때로는 가장 멀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는 사랑의 크기가 아닌, 바로 ‘기질’의 차이에서 비롯된 거리감이다. 나와 너무도 다른 성격과 기질의 아이를 볼 때, 그 차이는 굉장히 매력적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극도로 불편하고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가령, 모범생 기질의 엄마 눈에는 자유분방한 아이의 일상은 잔소리해야 할 일 투성일 것이다.
"왜 이렇게 부산스러워? 왜 정리가 안 되는 거야? 학교에 책을 안 가져간다는 게 말이 돼?"
엄마의 잣대에서 아이는 행동은 온통 '문제 행동'일 뿐이다. 하지만 아이에게 그 '부산함'은 세상을 탐색하는 자연스러운 에너지일 수 있다.
반면, 감정이 예민한 아이를 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부모는 어떨까?
부모는 합리적인 대화를 원하는데, 아이는 말 한마디만 해도 울기부터 하고,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표현하지 못하면서 삐지고 서운해한다. 부모는 "도대체 왜 우는 건데? 이유를 말해봐"라고 다그치지만, 논리보다 먼저 터져 나오는 감정의 서운함과 억울함을 아이는 도저히 논리적으로 표현할 방법을 알 길이 없다.
아이의 '서운함'은 비논리적인 반응이 아니라, 그냥 그 아이 자체의 섬세한 감각이자 존재의 표현이다.
이처럼 기질의 다름은 곧 부모의 다른 양육 태도를 요구한다.
도전적이고 활발한 아이에게 무조건 집안에 틀어박혀 책상에 오랫동안 앉아 공부해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보다 예측 가능한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거나 세상 속에서 안전하게 에너지를 발산하도록 돕는 편이 낫다. 기준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때, 아이는 자신의 활력을 긍정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행동과 말이 느린 아이는 채근하는 대신 시간적 여유를 주는 것이 필요하다. 느림은 게으름이 아니라 세상을 천천히 관찰하고 내면화하는 방식이다. 조급해하지 않고 아이의 속도를 존중할 때, 아이는 스스로의 리듬대로 성장할 힘을 얻는다.
반대로 속도가 빠른 아이에게는 부모가 아이의 속도에 보조를 맞추는 세심함이 필요하다.
아이의 빠른 생각과 행동을 따라가고 이해하려는 노력만이 충돌을 줄이고 교감을 만든다.
우리 어른들은 이미 잘 안다. 사람들이 얼마나 제각각 저마다의 성격과 기질을 지니고 살아가는지 말이다.
그런데 만약, 나와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누군가가 자신의 기준에 맞춰 나에게 행동을 강요하고 나의 모습이 잘못됐다고 한다면 어떨까? 즉흥적으로 떠나는 여행의 묘미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너는 어떻게 그 먼 곳으로 여행을 가면서 철저하게 계획을 짜지 않고 여행을 떠나는 거야?" "일정이 바뀌었다고? 어떻게 이제 와서 바뀔 수가 있지?" 하며 즉흥적인 변경을 절대 이해하지 못하고 비난한다면 어떨까? 이런 사람이 24시간 옆에서 같이 살면서 사사껀껀 잔소리를 하고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한다면 마음이 편할 수 있을까?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어른들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배려하며, 조율하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부모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아이에게
‘내가 옳고, 너는 틀렸다’는 기준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을까?
“왜 그렇게 느릿느릿하니, 좀 빨리 좀 해!”
“맨날 그렇게 즉흥적으로 결정하면 어떻게 해? 좀 생각이란 걸 해봐!”
“그 정도로 해서 되겠어? 좀 더 꼼꼼하고 완벽하게 해야지.”
“어쩜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니? 헛소리 그만하고 그냥 엄마 말 좀 들어.”
“괜히 친구 기분을 다 맞춰줄 필요 없어, 네 생각을 말해야지.”
이러한 말들은 아이의 성격과 기질을 고려하지 못한 일방적인 말일 수 있다.
아이의 말과 행동이 정말 ‘고쳐야 할 문제’인지, '나와 다름'일 뿐인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내가 살아온 길만이 정답이 아니고, 그 방법만이 옳은 게 아닐 수 있다.
아이 입장에서 ‘나는 왜 늘 혼 만날까?’, '나는 왜 꼼꼼하지 못할까?'라는 생각이 쌓이며
조금씩 자신다움을 잃어갈 수 있다.
부모의 양육 태도가 아이의 성격과 기질에 맞춰 조율될 때, 아이는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건강하게 성장한다.
아이의 기질은 고쳐야 할 문제가 아니라, 이해해야 할 언어다.
아직 스스로를 설명할 힘이 없는 아이에게, 부모는 그 언어를 번역해 주는 세상의 유일한 사람이다.
나와 다른 아이를 키우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어떻게 그럴 수 있지?”라는 질문을 수없이 던지게 된다.
그러나 아이들은 어른이 아니다.
어른인 우리는 서로 맞추고 조율하며 살아가지만, 아이는 아직 그런 능력이 부족하다.
그래서 먼저 이해해야 하는 쪽은 언제나 우리, 부모다.
아이의 본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은 그 아이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존중한다는 의미와 같다.
“너는 그 자체로 괜찮은 아이야.” 이 한마디가 아이의 내면에 평생 지워지지 않는 ‘신뢰’를 남긴다.
그 믿음 위에서 아이는 세상을 향해, 자신의 속도와 방식으로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결국, 아이를 바꾸려는 노력보다 그 아이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훨씬 더 큰 사랑이다.
부모의 수용은 아이의 자신감을 키우고, 그 수용의 언어가 곧 아이의 자존감이 된다.
“나는 있는 그대로 괜찮은 사람이다.”
그 확신을 심어주는 순간, 비로소 아이는 세상 속에서 자신답게, 그리고 단단하게 살아갈 힘을 얻는다.
"Your kids require you most of all to love them for who they are, not to spend your whole time trying to correct them."
자녀가 당신에게 요구하는 건 대부분 자기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 달라는 것이지, 온 시간을 다 바쳐서 자기들의 잘잘못을 가려 달라는 것이 아니다. - 윌리엄에어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