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여사친 밸런스 게임

가능과 불가능 사이에 뜀틀을 놓다

by 김형건

“여사친은 가능한가요?”


오래된 질문이지만, 여전히 누군가의 입에서 농담처럼 튀어나올 때마다 분위기는 조금 진지해진다. 그 질문은 단순한 연애 밸런스게임을 넘어선다. 그 안엔 우정과 욕망, 감정과 언어, 사회적 통념과 개인적 해석이 겹겹이 얽혀 있다. 결국 이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왜 여사친이라는 말을 해야만 안심할 수 있는가?”




“여사친은 가능한가?” — 가능한가, 아니면 애초에 틀린 질문인가

이 질문은 늘 둘 중 하나를 요구한다. ‘가능하다’는 성숙한 인간관계를 믿는 쪽이고, ‘불가능하다’는 본능과 감정이 모든 우정을 집어삼킨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 이분법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욕망이 있으면 우정이 깨지는 걸까? 욕망이 없다는 걸 증명해야만 우정이라 부를 수 있는 걸까?


“걔는 그냥 가족 같아.”

“원래 친구였다가 좋아지기도 하잖아.”

“그냥… 여자 사람 친구야.”


이 말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관계의 모호함을 해명하려는 서사다. 우정은 늘 '욕망 없음'을 입증해야만 살아남고, 욕망이 감지되면 우정은 부정된다.


그런데 감정이란 그렇게 쉽게 나눠지는 것일까? 우정은 욕망의 부재인가, 아니면 제어된 욕망인가. 이 질문 앞에서, '가능하다'와 '불가능하다' 사이의 뜀틀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여사친과 단둘이 여행, 가능?

이건 물리적 가능성보다 사회적 해석의 힘이 더 큰 게임이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더라도, 주변은 이렇게 말한다.


“근데 왜 하필 걔랑?”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


사실 여행이 위험한 건 ‘일’이 일어나서가 아니라, 그 ‘일어날 수도 있었던 가능성’이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단둘이 여행이란 상황 자체가 관계를 바꿨을 수도 있다며, 해석과 추측, 걱정과 기대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동시에 일어난다.


그 순간부터 중요한 건 객관적 사실이 아니다. 그건 감정보다도 상상된 감정의 문제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감정보다 타인의 상상을 더 무서워한다.




연애 상담은 상담일까, 테스트일까

“요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그 사람, 나한테 관심 있는 거 같지 않아?”


이런 말을 여사친에게 하는 순간, 상황은 단순한 조언을 넘어서기 시작한다. 정말 상담을 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상대의 감정을 떠보려는 걸까?


연애 상담은 때때로 감정의 시뮬레이션이다. 내가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말을 통해,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확인하려는 간접적 방식. 감정을 고백하지 않고도, 고백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언어의 마술. 사랑을 말하지 않으면서도, 그 주변을 배회하는 방식. 그게 바로 이 밸런스게임의 핵심이다.




여사친이 연애를 시작했을 때, 왜 마음이 이상할까

“행복했으면 좋겠어.”

“좋은 사람이야?”

“그냥 좀… 묘하네.”


이건 질투도 아니고, 미련도 아니다. 그냥 한때 함께였던 사람의 일상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이 되는 데서 오는 경계 재설정의 감정이다.


그녀는 여전히 나의 친구이지만, 이제는 나의 “가능성”은 아니다. 이건 상실이 아니라 ‘서사의 수정’에 가깝다. 어떤 관계는 끝나는 게 아니라, 그저 그 안에 있던 ‘미정의 감정’이 사라지는 방식으로 변화한다.




결국, 이 게임은 감정의 이름을 묻는다. 밸런스게임은 늘 선택을 요구한다. 그러나 감정은 그렇게 이분법으로 구획되지 않는다. ‘여사친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결국 다음과 같이 바뀐다.


관계는 언제까지 중립적일 수 있는가?

감정은 반드시 이름이 필요할까?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건 안전함일까, 오히려 제한일까?


가장 솔직한 답은 어쩌면 이것이다.


“모르겠다. 하지만 그 모름이 우리를 사람답게 만든다.”


우리는 감정의 경계에서 흔들린다. 우정과 썸, 가능성과 불가능, 말과 침묵 사이에서. 그리고 어쩌면, 여사친이라는 말은 그 모든 흔들림을 겨우 붙잡아주는 언어적 외줄일지도 모른다. 그 외줄에서 떨어졌을 때, 손 내밀어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친구이기를. 우리는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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