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_종이컵

by 김형건

한 잔의 물을 담은 종이컵을 놓고

잊힌 시간 속에 그대로 두었다

한참 뒤 무심코 잡은 종이컵은 이미 변해있었다


쭈글쭈글해진 그 형태를 보며

물을 마시고 나서야 궁금증이 솟구쳤다

"과연 시간이 지나면 찢어지는 것일까?"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시간을 두고 관찰했다

하지만 그 이상 변하지 않았다

내부에는 얇은 코팅이 숨어 있었기 때문에


그 순간 깨달았다

우리도 종이컵처럼 외부에 주눅 들지 않으려면

그런 얇은 코팅이 필요하다고


대단한 다짐보다는 저 얇디얇은 자존감의 층이

우리를 지켜주는 갑옷이 될 수 있다고




과학적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은 불편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새로운 호기심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에 대해 다시 질문을 던지는 순간, 익숙한 대상조차도 새롭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날, 종이컵에 물을 따르고 한동안 잊고 있었습니다. 작업에 몰두하느라 잊어버린 사이, 종이컵은 한껏 쭈글쭈글해져 있었습니다. 한눈에도 물기가 스며들어 약해진 모습이었죠.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이대로 두면 결국 찢어질까?" 답을 쉽게 찾아볼 수도 있었지만, 직접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몇 시간 더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종이컵은 더 이상 흐물거리거나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내부에는 얇은 코팅이 있었습니다. 손가락으로 만져보니 확실히 매끄러웠죠.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전혀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코팅이 없었다면, 종이컵은 물을 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형체를 유지할 수 없었겠죠. 하지만 보이지 않는 이 얇은 막이 종이컵을 지켜주고 있었습니다.


이 조그마한 발견이 나를 오래도록 생각하게 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는 외부의 압력에 쉽게 주눅 들고, 삶이 가하는 무게에 눌려 흐물흐물해지곤 합니다. 하지만 아주 얇은 코팅막 하나가, 그 조그만 보호층 하나가 우리를 지켜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존감’일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흔히 강한 정신력이나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세상의 풍파를 견딜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그런 거창한 다짐이 아니라, 아주 작은 자존감의 한 겹일수도 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 대단하지 않아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얇고 단단한 보호막이 있다면 우리는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종이컵보다 훨씬 복잡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단순한 사물에서 삶의 중요한 진리를 배웁니다. 마음이 힘들 때, 쉽게 스며들어버릴 것 같을 때, 종이컵을 떠올려 보려 합니다. 우리가 정말 필요한 것은 크고 단단한 갑옷이 아니라, 우리를 보호해 줄 얇지만 강한 코팅 한 겹일지도 모릅니다.


윤태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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