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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토 Jun 06. 2020

대신 기억해주는 시간

열한번째 이야기, 2020년 6월 6일 토요일. 날씨 더움.

언젠가 내게 기억할 수 있는 최초의 시간이 언제였는지를 물어봤던 이가 있었다. 그게 누구였는지도 가물가물할 정도로 나의 기억력은 좋지 않지만, 아마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기억은 복도식 아파트서 눈사람을 만들어 세워놨던 기억일 듯 싶다. 몇 살 때였을까. 알 길은 없지만 그보다 이전에 있었던 일들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찌됐던 내 최초의 기억은 눈사람이 되었다. 찬 바람이 부는 좁고 긴 복도 한켠 삐뚤빼뚤한 나뭇가지로 눈코입을 붙인 눈사람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장면으로 내 기억은 시작한다. 이것은 마치 비디오 테이프를 넣었는데 오분, 십분쯤은 아무런 화면도 나오지 않다가 갑자기 눈사람이 놓인 복도가 화면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것 아닐까 싶다. 다만 아직 놓지 못한 바램이 있다. 불현듯 첫 기억이라 믿었던 어떤 때를 앞선 날이 떠오른다면, 완전히 잊었던 어떤 날이 기억난다면. 


대신 기억해주는 시간

아. 네가 기억할 지 모르겠지만 오늘 아침 너는 유모차에 누워 아빠와 집근처 천변을 한시간이 넘게 거닐었단다. 아빠는 유모차를 끌고 이곳저곳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 꽃을 구경하는 사람들을 보았고, 물에 둥둥 떠서 제 몸을 씻는 오리 몇마리와 어른 팔뚝만한 물고기도 보았어. 몇몇 사람들은 유모차에 탄 네게 관심을 보였었는데, 너는 졸음이 온건지 겁을 먹은건지 실눈을 뜨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어. 별일도 별탈도 없는 어떤 토요일 아침이었던 거지.


그런데 말야, 오늘 아빠는 아직 어린 네가 기억하기 어렵고 아빠조차 까맣게 잊을 수 있는 평범한 토요일이 어쩌면 너에게 첫 기억으로 남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삶의 첫 기억이란 건 제맘대로 선택할 수 없고, 꼭 특별한 순간들로 채워지는 게 아니더라구. 마치 누군가 놓고 간 물건처럼 제 머리 속에 첫 기억으로 남겨지는 것 같아. 깜깜한 터널 끝을 지나 빛이 든 세상에서 처음 보이는 어떤 풍경, 어떤 장면을 첫 기억이라 칭한다면 언젠가, 한 십몇년쯤 지나 네게 첫 기억이 어땠는지 물어보고 싶구나.


아. 기쁘고 즐거운 기억이 많다는 건 분명 축복받은 일일꺼야. 그만큼 기쁘고 즐거운 날들을 보내왔단 뜻일테니까. 하지만 매일매일이 기쁘고 즐거울 수만은 없을 것 같아. 엄마도 아빠도,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러할거야. 웃음이 있으면 눈물이 있고 맑은 날이 있으면 흐린 날이 있는 것처럼 어떤 날이 기쁘고 즐겁다면 어떤 날은 슬프고 참담할 수 있겠지. 그래서 아빠는 어떤 날이든 봄이가 소중한 날이라고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네 삶에서 벌어진 일들이니까. 감사하다, 생각해보는거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네가 겪은 많은 일들은 그것이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가을날 낙엽처럼 바래질거야. 색바랜 낙엽이 쌓이고 쌓인 산에 가면 고소한 냄새가 나는데, 우리의 기억도 먼훗날 깊은 향이 밴 오래된 이야기로 남았으면 좋겠다. ♣


이번주 봄이는

아랫니 두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도 이가 난 게 간지럽고 거추장스러운지 입을 삐쭉빼쭉거린다. 3.2킬로그램에 세상에 나온 봄이는 이제 9킬로그램에 육박한다.


이번주 아내는

이유식을 시작하며 즐거워하면서도 이전보다 할 게 많아져서 그런지 더욱 피곤해한다. 모든 일은 시작이 반이고 처음이 고되기 마련인데, 육아는 시작은 시작이고 갈수록 고되져 만고의 진리가 통하지 않는 몇안되는 일들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빨이 난 것에 신기해하며 이번 주도 성실히 보내셨고 일요일은 미용실에 가실거라 선포하셨다. 


이번주 아빠가 읽은 문장

행복은 건강이라는 나무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무기명, 당현천(川) 벽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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