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나를 움직이는 것
나에게는 같은 과에 친한 친구들 무리가 있다. 연휴 때 다 같이 자동차를 빌려서 여행을 가기도 하고, 한 집에 모여서 파티를 하고 보드게임을 하는 그런 친구들이다. 그중에 하나가 R군이다. R군은 정말 똑똑한 친구이다. 학교 성적도 최상위권이고, 여러 분야에 관심이 많아서 내가 생각 없이 내뱉는 시답잖은 질문에도 신중하게 답을 해주고 많은 것을 알려주는 고마운 친구이다. R군은 나보다 일 년 먼저 우리 연구실에 들어갔고, 현재 석사 1학년이다. 내가 우리 연구실을 선택함에 있어서 R군의 영향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저 듣기만 하고 혼자 공부하면 되는 이때까지와는 다르게, 연구실에 소속되어 일본인 동기 선후배 교수님들과 팀워크를 이루어야 한다는 게 꽤나 부담이었던 나에게, R군이 있다는 것은 한줄기의 희망과도 같았다. 연구실에 배정되고 역시나 R군은 친절하고 섬세하게 나를 지도해 주었다. 가장 친한 친구이자 선배인 R군이 연구실 내에서 단단한 입지를 가지고 열심히 하는 것을 보면서 자연스레 나도 정말 열심히 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다.
우리 연구실은 '트라이볼로지'라는 학문을 연구하는 연구실이다. 마찰을 뜻하는 그리스어와 학문을 뜻하는 라틴어의 합성으로 마찰, 마모, 윤활등을 연구하는 연구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최근 연구실에서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분야는 전기차(Electric Vehicle *EV) 분야이다. 기존의 가솔린 자동차에서 전기차로 바뀌면서 엔진 또한 모터로 바뀌었고, 그 모터에 붙어있는 기어 부분에 관한 연구를 중점적으로 하고 있다. 나도 현재 EV팀에 소속되어 기어의 효율을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한 연구를 하고 있다. 내 연구에 관해서도 정리해서 블로그에 남기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보안상 어디까지 공개할 수 있는지 기준이 애매해서 후일에 넘기도록 하겠다. 내가 EV팀을 선택한 이유는 딱히 자동차를 좋아해서는 아니다. 기계공학의 입지가 예전만치 못하고 수요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시국에 EV는 똑똑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는 더 이상 플러스알파와 같은 유학생이 아닌, 주체적이고 중심에 설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교수님이 가장 공을 많이 들이고 있는 연구분야를 선택했다. 아직 이 선택을 완전히 후회하고 있지는 않지만, 연구 분야를 선택함에 있어서 가슴이 아닌 머리를 따라간 것에 대가는 앞으로 풀어낼 거의 모든 에피소드의 시발점이 될 것이다.
교수님에게 가장 촉망받는 학생인 R군 또한 EV팀이었고 이 친구의 연구가 황금 로드맵처럼 보였다. 그리하여, 이때가지 R군이 사용하던 실험기기를 이용한 연구테마를 선택하였다. 의욕이 넘쳐서 밤늦게까지 남아서 실험을 하기도 하고 먼저 선배들에게 물어서 논문을 받아 읽었고 동기들 중에 제일 먼저 졸업 논문 테마를 정하여 실험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열심히 할수록 초조해졌다.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열심히 하고 있기에 이 노력이 의미가 없으면 어떡하지 같은 걱정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처음부터 느끼고 있던 언어적 한계는 내 불안감을 더더욱 커지게 하였고 다른 동기들에 대한 경계심과 질투심으로 나는 점점 병들어 갔다. 나는 무언가 보상이 필요했다. 아니, 확신이 필요했다. 내가 걷고 있는 방향이 옳은 방향이라고. 내 노력이 의미가 있다고. 칭찬받고 싶었다. 어른이라고 칭찬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난 아직 어른이 아니니까!
이런 정신상태로 점점 지쳐가던 나를 단번에 일으켜 세운 것은 정말 사소했다. 정말 오랜만에 R군과 K군(R군과 같은 친구 중에 한 명)과 셋이 늦은 저녁식사를 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그날 저녁 약속은 당일날 번개로 잡은 약속이었고 지친 마음을 달래고자 오래간만에 모이자는 취지에서 내가 주도한 자리였다. 식사 자리는 생각보다 만족스럽지 못했다. R군과 K군에게 요즘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을 털어놓고 싶었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같은 연구실인 R군에게 그 이야기를 하기가 왠지 모르게 꺼려졌다. 마음은 어딘지 모르게 답답했지만 '말해서 뭐 해. 이미지만 나빠질 수 있어. 좋은 시간 보내고 가자'라고 생각하며 술을 마시지 않는 R군을 제외하고 K군과 함께 맥주 한잔을 마셨다. 그리고 우리 셋은 기분 좋게 밤거리로 나왔다. 아직 쌀쌀한 밤바람을 맞으며 집으로 걸어가면서 우리는 식당에서 마저하던 농담을 주고받았고 나는 어느덧 마음이 차분해졌다. 씁쓸하게 미소 짓는 것도 낭만이었다. 그때 불쑥 R군이 K군에게 말을 걸었다.
"K군! 우리 연구실에서 유즈쨩이 제일 열심히 하고 있어. 조교 선생님이 칭찬하셨어"
순간 귀를 믿지 못하고 R군에게 되물었다.
"정말이야? 조교 선생님이 정말 그러셨어?"
"응! 정말이야. 칭찬하셨어"
내 마음은 다시 연구실에 첫 발을 들였던 순간으로 되돌아갔다. 나란 사람은 정말 단순했다. 그간의 노력들이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교수님한테 듣는 칭찬보다 기뻤을지도 모른다. 제일 가까이서 지도해 주는 선생님이니까. 더 객관적인 평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마음을 다시 다잡었다. 조교 선생님은 모르실 거다. 당신의 그 칭찬 한마디로 나는 황금연휴 때 쉬지 않고 문닫힌 실험실에 들어가서 불을 켜고 실험을 진행했다는 것을. 내 안에 모터는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