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3세대
할아버지는 왼팔이 없었다. 의수가 가리킨 곳은 옥수수 밭 저 너머였다. 옥수수대는 12살의 내 키 보다 웃자라 있어 정확하게 어디쯤인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까치발을 들어 보았다.
"저기서 막 뛰어 내려왔지. 그 밤에 피가 철철 말도 못해." 하늘은 파랗고 노란 옥수수 수염들이 초여름 바람에 넘실댔다. 강원도는 인상적이었다.
일흔 여덟에 생을 마감하실 때까지 그 분의 두 딸과 어린 손녀는 몇번이고 그 곳을 찾았다. "아부지, 왜 여기로 왔어?" 막내가 물었다. "어디로 가야한다는 생각도 못했어. 살려고 그렇게 된 것 같아."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할아버지는 의수를 빼고 빨갛게 자국이 남은 자리를 연신 어루만졌다. 통증은 잊을만하면 찾아와 할아버지를 괴롭혔다. 차는 굽이굽이 산길을 달려야 했고 중심잡기가 어려운 할아버지는 보조석의 손잡이를 붙들었다.
"산 골 갚숙히 숨어살야겠다 싶었어. 태백산맥이 버티고 섰으시 쉽게는 못 찾겠다 싶은 생각도 들고, 여기가 유배도 오고 숨어 들잖아. 죄 직은 사람처럼 숨어 지냈지. 전쟁은 그만하고 집에 가고 싶었어." 할아버지는 긴 숨을 뱉었다. 장애가 죄가 되어, 죄 지은 사람처럼 숨어 지내다 진절머리 나는 전란의 한 복판에 다시 갈 수 밖에 없었던 26살의 청년이 그 때, 그 은혜를 갚을 길이 없어 하염없이 옥수수밭만 바라보고 돌아오는 길은 얼마나 황망했을까 싶다. 치료를 해 준 분들은 찾을 길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죄스런 마음을 더 할 뿐이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왼팔을 자세히 들여다 보기 무서웠다. 상흔이 공포로 여겨진 것은 어릴 때 뿐이었지만 그 분이 죄처럼 여기는 팔을 감히 마주할 수 없었다. 그러다 명절에 씨름을 보시다 잠이 드셨을 때 텔레비전을 끄려다가 무심코 눈 길이 가 본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할아버지의 팔은 성냥개비처럼 둥그스름하게 아물어 있었다.
아무도 빼앗은 적 없는데 왼팔을 잃은 할아버지, 아무도 빼앗은 적 없는데 가족을 잃고 고향을 잃은 할아버지.
역사는 이제와 죄인처럼 어쩔수 없었노라고 말한다. 평생을 죄인처럼 변명 한 번 못해 본 할아버지의 왼팔에 변명처럼 들러붙어 괴롭혔다.
죽기 전에 꼭 한번만이라도 가보고 싶다던 할아버지의 말은 유언이 되어 잊을 만 하면 나를 괴롭게 했다. 아직도 역사는 말한다. 어쩔 수 없었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