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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유채 Feb 04. 2024

우리는 같은 카테고리

창피하다.

 항암으로 대머리의 시련이 찾아왔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이다.  

처음에 의사가 양쪽 전절제한 가슴 수술부위를 복원하자고 제안했을 때 나는 가슴 없이도 살겠네라고 했지만, 의사는 나이가 젊은데 라는 말로 나를 설득했고, 나는 자의보다는 타의에 의해 수술했다. 하지만 거기서 내게 조금 시간이 주어졌더라면 나는 그른 선택을 했을 거라고 본다. 나는 그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의사는 내 양쪽 가슴에 보정물 무게를 언급하며 원래는 짝가슴이었는데 무게를 맞추고 조금 더 키웠다고도 했다. 어차피 보정물이고 그래봐야 가슴이고 보여줄 일도 없는데 가슴이 가슴이지, 실용성을 상실했다면 더더욱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항암이 진행되고 나에게 대머리의 시련이 왔을 때 복원을 진짜로 결심하게 되었다.


 대머리는 보이는 것이고, 가슴은 감춰진 것인데 사람들이 보이는 것을 대할 때 어떠한가 하는지 또 생각했다.

사실, 아니 어쩌면 의식적으로 그러한 태도를 취하지 않겠지만 나를 희끗 거리는 시선이 전부 느껴졌다. 나는 벙거지 모자를 눌러쓰고 혼자서 잘도 돌아다니고 뷔페 브런치에 가서 밥도 먹었지만 역시나 시선은 적응이 안되었다. 사람들에게 나는 늘 새로운 풍경이었다. 대머리의 시련이 지나가는 데까지 1년 6개월이 걸렸는데 그동안 나는 머리를 감추고 다녀야 했다.


창피하기 때문에 감추는 것일까

감추고 다닌다는 것이 수치일까.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사실 반년 전에 언론을 떠들썩하게 했던 장애아를 둔 유명인이 재판 판결이 났다는 뉴스를 접했다. 이 소를 통해 우리나라가 가진 시스템의 총체적 난국을 여실히 체감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동과 선생님이 보호받지 못했다는 데 있다.  교권을 지켜줘야 하는 것은 누구이며 장애아를 지켜줘야 하는 것은 누구인가. 결국 본질적으로 그 둘을 지켜내지 못했기 때문에 이 일이 일어난 거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한 번쯤 가정해 봤을 것이다, 아이가 만약 장애아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아이는 당연히 혼나고 사과하고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장애를 가진 아이였다. 약자이며 소수는 더 보호받아야 함에도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반이동을 하게 되었다. 더 꽁꽁 숨겨야 했고 비장애아동들 사이에서 튀는 풍경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아이와 비슷한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했다.  사실 아이는 한국에서 장애를 가진 아이라면 밟을 수밖에 없는 수순을 밟아나가는 중일 것이다. 대부분의 한국에서 장애아를 키우는 부모들은 불합리한 시스템에 적응해 나간다. 그리고 숨긴다.


 이 사건을 접하면 누구나 가정해 봤을 법한 것을 하나 더 말하자면 그가 유명인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이다.  장애아를 가진 부모가 사회적 지위가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은 커졌다. 만약에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이 아닌 보통의(이런 수식이 맞는 걸까) 부모였다면 이 일은 이렇게 커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동의 엄마와 삼촌까지 학교를 찾아가지는 않았고 교사와 면담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을 것 같다.

이 일은 그러니까 여러 가지 사회적 껍질에 싸여있다. 장애아동의 권리와 교사의 권리라는 것으로 그럴싸하게 둘러 싸여있지만, "장애아 키우면서 이 정도는 감소해" 와 "내 (남편)가 누구인지 몰라" 의 대립이다.


유튜브를 통해 그가 반년동안의 상황을 두 시간 동안 해명했지만, 나는 그의 '몰랐다'는 말이 마음이 아팠다. 어쩐지 그런 아버지를 둔 아이의 입장이 되어버렸다. 너무 바쁜 가장이라 아내와 아이 사정을 몰랐다는 아버지를 둔 아이는 어떤 마음일까. 아이는 어디로든 꽁꽁 숨어야 하고 지금보다 더 자신을 가둬야만 할지도 모른다.  

 

 더불어 아이와 선생님이 사회적 수치처럼 꽁꽁 싸매져 악취를 풍기며 썩어가는 골칫덩어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든든한 울타리에 둘러싸여 보호받을 수 있는 건강한 사회가 되기 위해 의식 수준과 시스템이 개선되면 좋겠다.


 결국 우리는 아버지, 교사, 교육부, 언론이라는 껍데기를 입고 있지만 같은 카테고리, 인간이라는 카테고리로 묶여 있기 때문이다.


 방문교사를 할때 집집마다 가보면 문앞에 킥보드며 자전거가 놓여있다. 아이들은 날이 따뜻해지면 그걸 타고 논다. 그러나 장애아가 사는 집엔 킥보드가 없다.  매주 40분정도 자폐를 가진 친구를 만나고 나오는 날이면 그 텅 빈 현관을 볼때마다 서글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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