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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몌 Mar 20. 2024

당신의 악보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날이 되면 조용히 눈을 감고 소원을 빌라고 다들 말하곤 했다. 딱히 떠오르는 소원이 없어도 상관없었다. 그런 축복과 축하의 시간은 매일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줄곧 그 순간에 빠져들곤 했다. 유유히 흩어지는 빨간빛의 촛불 앞에서 나는 늘 그렇게 생일을 축하해 왔다. 후 하고 촛불을 불어 끄고 나면 순간적으로 잠시 찾아오는 어두움 같은 것들도 좋았다. 찰나의 시간이 영원처럼 깜박거리는 것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대충 소원을 빌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밝음이 찾아오는 것 또한 내가 생일을 좋아하는 이유였다. 그 순간만큼은 삶의 매 순간을 그와 같은 과정을 거치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믿음이 생기곤 했다. 어두움 후에는 늘 밝음, 그리하여 태어남의 순간을 매번 축하하듯 내 삶의 모든 순간을 스스로 축복할 수 있는 내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곤 했다.






삶을 한 번도 탓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의 삶에는 쉽게 지나가기엔 어려운 높은 언덕과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호수가 너무나도 많다. 나는 이 장애물을 마주할 때마다 문득 나의 생일들을 떠올렸다. 내가 태어난 날, 내가 무언가 살아있음을 증명해 보인 날, 그런 날들을 생각하며 그때의 기쁨을 나누어 보려고 노력했다. 물론 힘들고 지치는 상황이 그로 인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기억을 떠올리며 현재의 나쁜 상황을 강하게 체감하는 것, 어쩔 수 없이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것이 나를 더 슬프게 하기도 했다. 



그래도 태어남, 을 부정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우울의 밤이 찾아오고 새벽까지 그 기운이 가시지 않는 경우라 하더라도 말이다. 나는 생각했다. 이미 나의 악보는 시작되었고 나는 그것이 끝날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연주해야 한다고. 연주를 시작하기로 한 것이 나 자신이 아니더라도 나는 이미 악기를 집어 들었다. 그것이 책임감으로 인한 것이거나, 아니면 진짜 진심으로 삶을 사랑해서이거나 그 어떤 이유에서든지 나는 악보를 스스로 연주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런 마음가짐은 나로 하여금 힘든 상황을 그럭저럭, 심지어는 꽤 괜찮은 방법으로 극복하게 해 주었다. 때로는 안 좋은 상황을 단순히 넘기는 것을 넘어서서 그 상황에서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다. 결국, 언제부턴가 매일이 생일처럼 흘러갔다. 태어나서 다행이라고 늘 나는 생각했다.



힘들다, 는 불평은 알고 보니 나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자신의 상황에서 부정적인 감정을 경험하고 그것 때문에 마음앓이를 하기도 하고 눈물 흘리기도 한다는 것을 갈수록 실감한다. 그럴 때면 내 일이 아니라도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마음들이 모여 나를 더 강인하게 만든다. 나는 앞으로 나만의 기쁨이 아니라 내가 아끼는 사람들의 기쁨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온 세상 사람들과 다 같이 행복하자고 거창하게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나의 태어남으로 인해 기쁨을 느꼈던 몇몇의 사람들 만이라도 나와 함께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소원이 있다. 사실 매 생일마다 그것을 소원으로 빌었다. 나의, 우리의,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의 안녕을 바라는 일을 매년 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이렇게 소원을 빌다 보면 정말이지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을 것만 같다. 






삶을 항상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아니다. 별생각 없이 앞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와중에도,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너무도 잘 알 것 같은 불안감 모두가 동시에 마음을 두드릴 때도 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포기하거나 뒤로 물러서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우리는 모두 이 시간과 공간 속에 너무도 소중한 의미를 담은 채 태어난 존재들이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잊더라도 그 사실만은 꼭 기억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적당한 음표와 쉼표를 가진 하나의 근사한 악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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