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음을 거닐다 Oct 29. 2020

사건 사고 없는 여행은 없다(2)

II. 길 위에서

인도 모기와의 혈투


네팔 포카라에서 열흘간의 안나푸르나 트레킹도 마치고, 며칠 동안 포카라에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다 인도로 넘어가는 길에 인도 모기와 혈투의 밤을 보냈다. 그날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무섭고 끔찍하다.


네팔 포카라에서 인도 바라나시까지 가는 길은 매우 험난하고 고단했다.


우선 포카라에서 네팔-인도 간 국경도시인 소나울리까지 '로컬버스'를 타고, 8시간 여를 달려간다. 투어리스트 버스가 아니라 로컬버스이다. 당시 포카라에서 네팔 국경까지 가는 버스는 로컬버스 밖에 없었다. 만약 여행사에서 투어리스트 버스라고 했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내 앞에 앉은 독일 여자는 여행사에서 투어리스트 버스라고 속아서 왔는지, 가는 내내 '왜 이렇게 돌아가냐', '사람을 많이 태우냐'라며 항의하고 짜증을 냈다.


나는 동남아에서부터 이런 이동에 단련되어서이기도 하고, 애당초 버스에 대한 기대 수준이 낮아서인지 '예상보다' 넓은 좌석에 나름 만족을 했다. 이번 여행 특히 인도 여행에서 다시 한번 느끼는 것이지만, 삶의 만족을 높이는 방법 중 하나는 기대 수준을 낮추는 것이다. 기대가 낮으면 작은 것에도 감사하게 되고 뜻밖에 찾아온 기대 밖의 선물에 더 경탄하게 된다.


소나울리 국경지대는 가이드북에 나온 것처럼 무시무시하고 살벌하지는 않았다. 왕래하는 사람이 많으니 산만하고 살짝 을씨년스러운 느낌이었다. 두 나라가 대치하고 있는 곳이 따뜻하고 푸근할 수는 없지 않나? 출국과 입국 절차를 밟고 남은 네팔 루피를 인도 루피로 환전한 후, 고락뿌르로 가는 인도 버스에 탑승했다. 4시간 여를 달리는데, 길도 울퉁불퉁한 데다 8시간 버스 탑승 후 연달아 또 버스를 타니 이제야 엉덩이가 '나 죽겠네~~'라며 하소연을 한다. ‘미안하다 내 엉덩아. 좀만 참아.’ 그래도 창 밖으로 바라보는 해 질 녘 풍경은 좋았다. 고되기는 했지만,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원래 계획은 고락뿌르에서 출발하는 바라나시행 야간 기차를 타려고 했으나, 이미 표는 다 매진되었단다. 할 수 없이 고락뿌르에서 하룻밤 묵고 가자란 생각으로 역 앞 호텔에 들어갔다. 이름이 호텔이지 이제까지 내 생의 최악의 숙소였고. 앞으로도 이보다 더한 숙소는 못 찾을 거 같다. 다음날 새벽에 일찍 표를 사러 나와야 했기에 멀리 갈 수는 없고, 역 앞에 줄줄이 서 있는 허름한 호텔에서 자야 했다. 그러나 그나마도 처음 간 두 군데는 방이 없다고 하여, 포로 수용소같은 세 번째 호텔에 묵기로 했다. 포카라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 고락뿌르까지 같이 온 동생인 셀리는 이미 밤 기차표를 예매해둔 터라 나와 저녁을 먹고 호텔 구하는 데까지 같이 다녔다. 이 친구가 숙소를 보고, 나를 혼자 두고 가는 것에 무지무지 미안해했다. 누구와 떨어져서 혼자 지내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는 나 조차도 이 숙소에서 혼자 하룻밤을 지낼 생각을 하니 무섭고 서글퍼질 정도의 삭막한 방이었다. 시트는 백만 년 동안 한 번도 갈지 않은 듯 색이 바래 있는 것은 물론 때가 꼬질꼬질했다. 화장실의 샤워꼭지는 떨어져 나가 물을 틀 수 조차 없었다. 어차피 이 곳에서 옷을 벗고 샤워 따위는 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떨어져 나가 덩그러니 바닥에 굴러다니는 샤워꼭지를 보니 마음속에 '쌔앵~'하는 바람소리가 들렸다. 관광지가 아니기에 하룻밤 거쳐가는 아쉬운 손님들만 받다 보니 똥 배짱으로 관리가 허술한 듯했다.


하룻밤이니 잠시 눈만 부치고 새벽에 첫차를 타자란 생각으로 우선 세수와 양치만 간단히 했다. 비누칠을 하는데, 얼굴에서 땟국물이 주르르... 하루 종일 버스에서 맞은 먼지가 얼굴 위에 살포시 안착해 주셨나 보다. 모든 행동을 최소화했다. 도저히 더러운 시트 위에 몸을 내맡길 수가 없어 내가 갖고 있던 작은 담요를 깔았다. 입던 옷도 그대로 입고 재킷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고 완전 무장한 채 몸을 뉘었다. 버스를 타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부산을 떨어서 피곤했던지 잠이 금방 들었는데, 30분 정도 지났을까.. 선풍기를 틀지도 않았는데 눈 위로 바람이 휙휙 지나가는 느낌이 들고, 얼굴이 간질간질하다. 깨어서 불을 켜고 거울을 보니 이 모양이 되어 있었다.


코와 오른쪽 눈두덩이 위, 그리고 볼 두어 군데에 인도 모기가 키스를 해주었다. 인도 왔다고 환영인사를 제대로 하는군.



두건 쓰고 잠을 청해봄


그런데 헉! 자세히 살펴보니 이 방이 모기 소굴이었던 거.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한 두 마리가 아니다. 몇 마리 잡아 족을 쳤는데, 계속 끝이 없이 달려든다. 모기떼의 습격에 너무 공포스러웠다. 과장이 아니고, 진짜 공포감으로 사지가 떨렸다. 게다가 인도는 말라리아 위험 국가다. 물론 말라리아 약을 처방받아 오긴 했지만, 원래 입국 2주 전부터 먹어야 하는데, 때를 놓쳐 1주 전부터 복용을 시작했다. 혹시 약효가 안 나타는 거 아녀? 나 이러다가 말라리아로 사망하는건가? 피곤은 하니 잠은 자야겠고 해서 두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자는데, 밀려드는 또 다른 걱정... 이러다 나 질식사하는 거 아녀? 신문에 나겠지. "한국인 여성 고락뿌르에서 모기 피하려다 두건 쓰고 질식사" 아니다. 이 사람들은 두건을 쓴 나의 동기를 파악하지 못할 터, 자살로 생각하는 거 아니야? 자살의 동기를 파악하려 애를 쓸 것이고... 하하하.. 이 와중에 이런 쓸데없는 상상이라니... 죽지 않으려고 입 쪽은 살짝 드러내 놓고 잠이 들었다. 잠이 들었다 깨다가를 반복하다, 시계를 보니 아직 밤 12시. 아침아 제발 빨리 와라. 제발!! 그리고 2시간 정도 잤을까. 얼굴이 너무 가려워 일어났더니 이 몰골이 되어 있었다. ㅜㅜ



KO패를 당한 복서인가? 모기에 뜯기면 이렇게 얼굴이 부어오를 수도 있음을 알게 됨. 저 이렇게 못 생기진 않았어요. ㅎㅎㅎ


얇은 두건을 뚫고 모든 살점을 남김없이 뜯어 주신 것이다. 덕분에 얼굴이 다 붓고, 게다가 인간적으로, 아니 모기적으로 너무한다 싶은 게 눈을 물면 어떻게 하냐고... 눈도 뜰 수 없게 사정없이 뜯어놓았다. 원투 펀치 연속으로 얻어터진 권투선수처럼 변해버린 내 모습에 경악하고, 모기들이 흡혈귀처럼 공포스럽고, 방은 왜 이리 스산하며... 내가 여기는 왜 와서 이 고생이냐 싶은 것이 인도고 나발이고, 진정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새벽 3시. 더 이상 잠들었다간 모기떼에게 얼굴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아, 1시간 동안 기다린 후 역에 나가니 그 시간에 표를 팔고 있었다. 아침 차로 5시 30분과, 6시 30분 차가 있어 아침 먹고 여유롭게 6시 30분 차를 타고 갈까도 생각했지만 이 지긋지긋한 고락뿌르를 뜨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했다. 그래서  5시 반 기차표를 사서 곧바로 호텔에서 짐을 챙겨 나왔다. 이렇게 간밤에 모기와의 혈투를 벌이고 고락뿌르에 이를 갈며 쓸쓸한 패잔병으로 기차에 올랐다. 이런 몰골이 유일하게 좋았던 점은 여성 외국인 여행자에게 으레 일어나는 인도 남자들의 집적거림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덕분에 편하게 기차여행을 할 수 있었다.


처음 타는 인도 기차. 기차 창문은 닫아도 닫아도 계속 열리고, 날씨는 왜 이리 추운지...
 반가운 '짜이~~' 소리.


짜이 파는 장사꾼에게 짜이 한잔을 주문하고 돈을 내려는데, 100루피짜리 밖에 없다. 기차에서 파는 짜이는 당시 5루피였는데, 잔돈이 없다니 장사꾼이 됐다며 발길을 돌린다. 안 판다는 모양이구만. '힝~' 그래서 짜이 잔을 되돌려주려 하니 그냥 먹으란다. 짜이 장수도 내가 불쌍해 보였나 보다. 뜨거운 짜이 덕분에 잠시나마 몸을 녹이고, 기차는 달려 바라나시에 도착했다.    


이밖에도 인도에서 상기도 감염과 바이러스 결막염에 걸려 일주일간 눈이 퉁퉁 부어 외출도 못한 적도 있고, 길을 잘못 들어 무시무시한 곳에 가기도 하고... 여러 사건 사고가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여행자의 마인드로 현실의 역경을 대하기


여행하면 좋은 이미지가 떠오른다. 현실로부터의 탈출, 쉼, 이국적인 경험, 새로운 음식 등. 그러나 이렇게 좋은 것들로만 구성되어 있다면 오랜 시간 여행이 인생의 은유로 회자되지 않았을 것이다. 여행을 하다 보면 다양한 사건, 사고가 발생하기 마련인데 왜 아니겠는가? 평생 아무 일 없이 평탄하게 살아온 인생은 거의 없듯이, 삶에 빗대어지는 여행에서도 아찔한 사건, 사고 없이 지나가지는 않는다. 특히 장기 여행에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장기여행을 다니면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사건, 사고나 어려움이 없을 수 없다. 물론 무사히 안전하게 여행을 하기 위한 준비와 주의는 필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측할 수 없는 요인들이 있고, 때로는 여행자인 나도 인간이기 때문에 실수할 수 있다. 그러기에 사건, 사고, 어려움이 없이 여행을 끝마치길 기대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삶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삶에서의 위기나 역경은 여행의 그것들보다 훨씬 더한 강도의 힘듦이다. 내가 배낭 메고 장기여행을 다녀왔다고 말하면 여러 반응이 나오지만, 그중의 한 가지 반응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냐’, ‘힘들지 않았냐’, ‘대단하다’란 반응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사실 사는 거 자체가 고(苦)라고. 삶을 버티며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위대한 일이다. 장기여행을 다녀온 사람이나 바라보는 사람이나 그런 여행에 대해 대단한 선택이나 고행을 한 것처럼 미화하는 것을 보면 약간은 씁쓸하다. 떠나는 것도 머무르는 것도 자신의 선택일 뿐이다. 그리고 '삶이 여행'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삶 자체도 고된 여행이고, 오히려 실제 삶에서 마주친 역경들은 현실과 현실의 사람들과 얽혀있고 쉽게 도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언제든 털고 떠날 수 있는 방랑자의 삶에서 부딪히는 것들에 비견할 수 없는 고됨이 있다.


나 또한 내 삶에서의 고난과 역경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어린 시절 겪었던 가족의 문제, 급작스레 찾아온 청천벽력 같은 집안의 위기, 정체성의 혼란, 믿었던 사람으로부터의 배신 등을 겪었다. 굵직굵직한 것들만 뽑아서 그렇지 자잘한 것까지 뽑으면 수도 없을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 겪었던 또는 겪고 있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지나고 나면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일들이지만, 그래도 잘 견뎌왔다. 어떤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내 마음에 남았거나 현재의 삶에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잘 견뎌오고 잘 버텨왔다. 그리고 그런 역경에도 무너지지 않고, 그리고 무너졌다 하더라도 다시 회복해서 일어나 ‘지난 일은 지난 일이지’ 하며 ‘현재에 충실’했기 때문에, 지금의 나는 이전보다 괜찮은 사람이 되었고, 견디는 힘이 커진 사람이 되었다. 이런 특성을 일컬어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라고 부른다. 고무공에 압력을 가해 누르면, 그 순간 고무공은 움푹 들어가지만, 손을 떼면 곧 원상태로 돌아온다. 그런 특성에 빗대어 붙여진 이름인데, 우리 인간도 역경에 처하면 그 순간 힘들고 좌절하지만, 금세 원상태로 돌아올 수 있는 회복력이 있다. 이런 회복력이 높은 사람을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회복탄력성은 기질적인 요인에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경험과 학습에 의해 충분히 길러질 수 있다.


현실의 삶에서의 고난과 역경에 비하면 여행에서의 사건 사고는 별거 아니라면서 여행 이야기는 왜 하는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끌어오는 이유는 현실에서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또는 회복탄력성을 기르는데 팁을 여행에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자는 정착한 사람이 아니라 방랑자이기 때문에 그곳, 거기에서의 사람들, 그 순간들, 내 소유물 등에 대한 집착이 없거나 덜하다. 그 순간에 충실할 뿐, 떠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그 문제들을 두고 떠날 수 없다. 그러나 현실의 역경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가만히 살펴보면 집착이 숨어있다. 어린 시절의 자율권이나 선택권이 완전하지 않을 때 부모나 중요한 타인으로부터 받은 고통은 논외다. 다만, 성인이 되어 내가 내 삶을 선택하고 통제할 수 있을 때, 그 역경을 잘 견뎌내려면 여행자의 마음가짐처럼 집착을 버리고 현재에 내가 경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러면 살아있어 경험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게 되고, 배우고 알게 된 것에 집중하게 된다.


여행에서 돌아와서, 회사 다니기 이전에 했던 심리상담 일을 다시 했고, 몇 년 전 내 개인 상담소를 열었다. 나름의 큰 구상이 있었기에 무리해서 큰 규모로 열었다. 비용을 절약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꾸미고 싶은 마음에 직접 발품 팔아 인테리어를 했다. 그러다 보니 상담소에 대한 애착도 컸다. 그러나 개업식도 하기 전부터 발생한 건물주와의 문제 등을 겪고, 처음부터 혼자 감당하기에는 큰 규모로 상담소를 열게 되어 이런저런 고민이 생겼다. 결국 여러 고민 끝에 1년 만에 현재의 상담소로 이전을 했다. 그 과정에서 금전적 손실도 발생할 수밖에 없었고, 무엇보다 1년 동안 건물주와의 일로 정신적 스트레스가 컸다. 그 과정에서 그래도 잘 견디고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에게 되 내었던 말 덕분이었다. ‘이것도 일종의 여행이지 뭐.’ 여행 다니면 내가 원하는 대로 이뤄지지 않는 경우도 있고, 예상치 못한 일도 있고. 그리고 이 손실 비용은 ‘사업’이라는 여행지를 다녀온 비용이라 생각하자. 덕분에 배운 것들이 있었고, 시도하지 않았으면 몰랐었을 것들을 경험하고 알게 되었다. 그리고이 과정에서 느꼈던 소소한 성취감과 기쁨 등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지고, 후회나 자책 또는 원망 등에서 벗어나 터벅터벅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여행하듯 인생을 살자란 모토가 나에게는 그저 머리로 떠올린 은유가 아닌 현재의 삶에서 적용하는 실전 매뉴얼이다. 앞으로 또 어떤 역경이 닥칠지 모르겠지만, 그때도 여행에서의 고난을 맞이할 때와 같은 마음가짐이라면 조금은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전 05화 사건 사고 없는 여행은 없다(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