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둘러싼 세 가지 기억
# 1 _ 감나무를 둘러싼 새들의 생존 투쟁
우리 집 앞에는 감나무 네 그루가 서 있다. 연중 각종 조류의 쉼터이자 먹이 공급처가 되어 주는 것은 물론이다. 그래서 우리는 겨울이 되어도 가능한 한 감을 모두 따지 않는 편이다. ‘가능한 한’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이웃집 어르신들이 “왜 아까운 감을 다 따지 않는 거냐”며 성화를 부리기 때문이다. 그럴 땐 그냥 솔직하게 새들 먹으라고 일부러 안 딴다고 말한다. 그러면 고맙게도 혀를 끌끌 차는 대신 가벼운 미소로 웃어넘기신다.
이렇게 해서 “이런저런 새들이 감을 맛있게 먹었습니다”로 끝나면 좋겠지만, 사정은 그리 간단치 않다. 감나무 주변에서 이 구역을 차지하려고 연중 신경전을 벌이는 새들은 대략 서너 종인데, 그중 물까치와 직박구리의 대결이 가장 치열하다. 같은 종들끼리도 서로 경쟁을 벌인다. 게다가 이 싸움은 때로 ‘목숨을 건’ 대결로 이어진다.
12월경, 집 안에 있다가 밖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나는 걸 들었다. 얼마나 심상치 않았는지, 우리 집 고양이 두 마리가 모두 놀라 창가로 뛰어가 밖을 살필 정도였다. 말 그대로 대전투가 벌어지는 소리였다. 이대로 두면 무슨 일이 나겠다 싶어 새들을 해산시킬 요량으로 밖으로 나갔는데, 이미 일이 벌어진 뒤였다. 물까치 한 마리가 감나무 아래 마당 한쪽에 떨어져 퍼덕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가까이 다가갔는데도 달아나지 않는 걸 보면 부상이 심각한 게 분명했다.
# 2 _ 감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니 미안했다
난 이 녀석을 어디 동물병원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저 바로 군청에 전화해 이런 경우 야생조류를 치료해 줄 만한 곳이 없느냐고 물어봤을 뿐이다. 친절하게도, 군청 직원은 인근에 야생동물 구조와 치료를 해주는 곳이 있는지 알아보고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며, 천을 깐 바구니에 녀석을 넣어 두었는데, 곧 숨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좀 이상한 이야기지만, 난 생명체가 숨을 거두는 과정을 그렇게 세밀하게 목격한 것이 처음이었다. 물까치는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더니 ‘큰 숨’을 내쉬고는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물까치가 처음 부상을 당해 바닥에 떨어졌을 때, 녀석은 무척 격렬하게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러다 점점 숨소리가 안정을 찾아갔는데, 난 그게 ‘괜찮아지는’ 신호라고 착각을 했던 거다. 정말 죽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한동안 녀석을 들여다보고 귀를 대보고 손으로 촉진하듯 심장이 있을 법한 부위를 만져보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녀석이 죽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감을 그냥 다 따버릴 걸 그랬나? 먹고살라고 남겨두었는데, 서로 먹으려다 죽고 말았다. 녀석을 뒷산에 묻어주었다.
# 3 _ 살려고 애쓰는 일이 곧 죽음에 이르게 하기도 한다
물까치를 묻어주다가, 난 내 오래된 습관대로 생각이 꼬리를 물었고, 10여 년 전 북한산 인근에서 묻어주었던 길고양이가 생각났다. 그 녀석은 막 지나가던 택시에 치인 참이었다. 내 잘못이 컸다. 난 그때 지인과 등산을 마치고, 그 녀석이 자리하고 있는 곳 건너편 선술집 야외 테이블에서 순대와 간을 안주 삼아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음식 냄새를 맡은 녀석이 길을 건너 뛰어오다 차에 치인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내가 달려가 고양이의 몸을 들어 안았을 때, 녀석의 몸은 아직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선술집 주인에게 부탁해 삽을 얻어 인근 산자락에 묻어주었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길을 건너오기 전 고양이의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배고파 우는 소리였다. 녀석도 먹고 싶어 뛰어오다 죽고 말았다.
사는 일이 그렇다. 살려고 애쓰는 일이 곧 죽음에 이르게 하기도 한다. 혹은 살아가고자 벌이는 일이라 믿는 행위가 삶을 죽음에 이르게 하기도 한다. 생존을 위한 욕구는 너무 강렬한 거라서 그 바로 뒤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망각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 4 _ 매일 죽음을 목도한다는 그이의 글을 보다가
매일 죽음을 목도한다는 이웃의 글을 보다가, 이 공간에서 처음 만난 그이의 글을 보다가, 이런저런 생각에 빠졌다. 감나무를 둘러싼 물까치 이야기도, 고양이 이야기도 실은 그이의 글을 보는 바람에 다시 떠오른 것이다. 마침 이 공간의 첫 글을 어머니의 죽음을 떠올리며 쓴 마당이었다. 그이의 연령대일 때, 난 죽음에 더 가까이 다가가 있는 지금보다 죽음에 대해 더 많이 생각했다. 그건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이보다 더 젊었을 때, 더 어렸을 때, 난 그이의 연령대일 때보다 더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내 육신이 지금보다 더 활발하게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을 때 말이다. 실은 그때만 해도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는 사실이, 결국 죽기 위해 그토록 맹렬하게 살아내야 한다는 사실이 무척 부조리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그래서 그렇게 죽음에 대해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게 전혀 부조리한 일이 아니라는 걸 수용하게 된 것은 지근거리에서 죽음을 경험하는 일들이 하나둘 늘어나면서부터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난 당신의 삶이 전혀 부조리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이제 좀 편안해지셨기를 바랐다. 어머니는 결국 죽기 위해 기어코 살아냈을까? 아닐 거다. 그저 살아 있기에 살아낸 거다. 다만 살아내는 일이, 기어코 살아내려 애쓴 일이 죽음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게 만들었을 수는 있고,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는 과정을 힘겹게 만들었을 수는 있다. 하지만, 난 대체로 죽음이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믿는 편이다. 의학이 아무리 발달되어도, 우리가 아무리 몸을 관리하고 애를 써도, 어찌 보면 정해진 운명에 따라 맞이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내가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아직 따뜻했다. 아버지가 자릴 비우고 혼자 남았을 때, 뭐라도 이야기할 걸, 별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어지럽게 놓여 있는 기저귀, 어머니 머리맡의 기저귀가 보기 싫어 “에이, 엄마는 왜 이런 걸 머리에 베고 있어”라고 말한 게 다였다. 그렇게 기저귀를 빼며, 모로 누운 어머니의 머리를 고쳐 주며 얼굴을 만졌을 때, 아직 온기가 남아 있단 걸 알았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 미안해요. 따뜻한 말 한마디 해드리지 못했어요. 정말 미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