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말 한마디

잘 듣지 못해 잘 말하지 못하는 내가

by 식목제

예전에 ‘따뜻한 말 한마디’라는 제목의 드라마를 한 적이 있다. 제목에 끌려 드라마를 보다가 결국 마지막 회까지 보진 못했지만, 그 제목만큼은 오랫동안 잔상으로 남았다. 어제, 어머니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못해 드린 것을 미안해하다가, 그게 생각났다.


# 1 _ 말을 한다는 것, 혹은 소통한다는 것


인간을 다른 종과 구분되게 만드는 최상위 능력 중 하나는 ‘말’이다. 물론 다른 종들도 각자의 의사소통 방식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만큼 다채롭고 세밀한 ‘언어 행위’를 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인간 종으로 살다 보면, 이 능력이 정말 좋은 의미에서 ‘최상위’ 능력인지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곤 한다. ‘따뜻한 말 한마디’란 표현이 가슴 깊이 와 박힌 것도 그 때문이다.


난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해 유려한 표현을 구사하는 연사의 말을 대체로 신뢰하지 않고, 그런 연설에 잘 감동받지도 않는다. 그런 말들은 대개 상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소통이 아니고, 자신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늘어놓는 것에 불과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경우는 내게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이와 내가 직접적으로 관계할 일이 별로 없고, 덕분에 쌍방 간에 감정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상호작용이 일어날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물론 내 가치관과 전적으로 반대되는 입장을 늘어놓는 경우라면 분노가 치밀어 오를 수 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다. 이후 내내 그이를 떠올리며, 그이와 부딪히며 감정적 다툼을 벌일 일은 없다.)


# 2 _ 실은 잘 듣지 못하는 거라서


문제는 일상의 관계에서 일어난다. 우리는 대부분 ‘잘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잘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개 ‘잘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관계 속에서 ‘잘 말한다’는 것은 앞에서 예로 든 연사처럼 일방적으로 떠들어대는 것이 아니라, 상대와 ‘잘 소통한다’는 것을 의미해야 한다. 잘 소통하기 위해서 ‘잘 듣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잘 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이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길 바란다는 데 있다. 이 단순한 사실들이 서로 논리적으로 충돌한다는 데서 심각한 소통의 구멍이 생긴다. 누구나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길 바라지만, 누구나 타인의 말은 잘 들어주지 않는다.


‘아니야. 난 잘 듣는데?’ 우리는 잘 듣는다고 믿는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 상대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하고 경청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서, 우리는 보통 타인의 이야기를 듣다가 자신의 생각이 개입되고 그 생각이 상대의 이야기를 재조합하거나 재해석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나 역시 그렇다. 그래서 20년 넘게 대화(라고 믿는 것)를 나눠온 아내와도 여전히 다투는 것이다.


# 3 _ 따뜻한 말 아래 담긴 공감과 경청


‘빈말’이 아닌 진심 어린 ‘공감’을 바탕으로 한 ‘따뜻한 말 한마디’는, 그래서 너무나 건네기 어려운 말이다. 내가 건네기 어려우니, 상대에게 듣는 일도 어려운 건 마찬가지다. 빈말이라도 기왕이면 따뜻하게 건네면 좋겠지만, 때로는 그 빈말들이 너무 공허해서 “힘내”라는 응원의 말이 전혀 위로가 되지 못하기도 한다. 우리가 원하는 건 ‘따뜻해 보이는 말 그 자체’가 아니라 ‘따뜻한 말 아래 담긴 공감과 경청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누군가의 말을 듣고, 누군가의 글을 읽는다. 하지만 그저 귀로 듣고 눈으로 읽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듣고 읽는 것이 어려운 일임을 안다. 나의 각주가 아니라 그이의 마음 그대로를 들여다보는 게 어려운 일임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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