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어쩌면 선택의 순간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 바로 앤디 듀프레인(팀 로빈스 분)이 피가로의 결혼 <저녁 산들바람은 부드럽게>를 틀어 교도소 안에 울려 퍼지게 만드는 부분이다. 그 부분에서도 특히 더 좋아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건 앤디가 머뭇거리며 ‘망설이는’ 모습을 보여주는 아주 짧은 순간. 교도소장이 당장 문을 열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윽박지를 때, 앤디는 어떻게 해야 하나 아주 잠시 고민하는 몸짓을 보인다. 내겐 바로 그 순간이 결정적인 장면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망설임의 ‘순간’이 있다. 어떤 경우에는 좀 더 긴 망설임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그 순간이 지나면 어떤 식으로든 선택을 해야만 한다. 그러니 망설임의 순간은 선택의 순간이기도 하다.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하기로 선택할 수도 있고,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선택할 수도 있다. 분명한 건, 망설임 없이 아주 간단명료하게 선택할 수 있는 일보다 그렇지 않은 일들이 더 많다는 점이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앤디의 망설임이 내게 결정적인 장면으로 다가온 건 그 때문이다. 우린 숱한 망설임의 순간에 직면해야 한다는 것, 물론 그중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선택이 걸려 있는 순간도 있겠지만, 때로는 그 망설임 뒤에 삶의 방향과 지형을 바꿀 만한 중요한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그때 그 망설임의 무게는 다르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망설임 뒤에 앤디가 내린 선택은 LP판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볼륨을 더 키우는 것이다. 물론 그 선택으로 그의 삶이 극적으로 바뀐 것은 없다. 그저 독방에 갇히는 신세가 된 것뿐이다. 그뿐인가? 아니다. 중요한 건, 앤디가 자신의 영혼을 지키기로, 그리하여 마침내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날을 예비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건 마치 (조금 과장해서) 빅터 프랭클이 ‘죽음의 수용소’에서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기로, 인간으로서 기어코 살아남기로 한 것과도 비슷하게 다가온다.
물론 망설임과 망설임 뒤의 선택이 늘 좋은 결과 혹은 자신이 바라던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앤디의 선택이 영화의 결말처럼 ‘쇼생크 탈출’과 ‘자유’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독방에서 시름하다 병사하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다. 따라서 다시 생각해봐야 할 지점은, 망설임의 순간 내가 고민하는 것이 과연 선택에 따라 기대되는 결과에 더 무게를 둔 것인지, 아니면 그 선택을 해야만 하는 나의 가치관, 목적의식, 동기 같은 것들에 더 방점을 둔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물론 결과에 대한 기대 없이, 무작정 어떤 가치, 목적의식,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건 몽상에 불과할 수도 있다. 어떤 결과를 기대한다는 것에는 실현 가능성에 대한 희망이 포함되어 있고, 실현 가능성에 대해 희망을 품는 것은 망설임 뒤의 선택과 선택에 따른 과정을 받아들이는 데 중요한 동인이 될 수 있다.
다만, ‘결과만’을 기대한 선택을 해서는 안 되는 까닭은, 삶의 과정에서 우리가 맞닥뜨리게 되는 숱한 사건의 결과란 대체로 우리 뜻대로 산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과만을 바라볼 때, 그 결과가 뜻대로 산출되지 않을 때, 우린 절망하고, 우리의 선택을, 나아가 그 선택을 낳은 망설임의 순간을 질책하고 회한에 빠진다.
어쩌면 그것은 욕망과 희망의 차이일 수도 있다. 결과만을 기대할 때, 우리는 자신의 욕망이 충족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그것의 충족 여부에만 온 마음을 집중시킨다. 하지만 이때 우리는 결과를 받아들며 그것이 정말 자신이 바라던 만큼의 욕망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대개는 부족하다고 느낄 것이다.
희망의 성격은 좀 다르다. 희망은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망설임의 순간, 어떤 가치관, 목적의식, 동기에 무게를 둔 선택을 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희망한다는 것, 어떤 ‘가능성’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결과를 떠나, 여기서는 그 희망을 향해, 그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 자체가 중요해진다.
영화에서 가석방된 레드(모건 프리먼 분)는 앤디를 찾아 떠나며 ‘희망’을 노래한다. “Hope is good thing.” 레드는 ‘망설임’의 순간, 죽음을 선택하기보다, 교도소로 돌아가기로 선택하기보다, 앤디를 찾아가기로 한다. 앤디를 찾아가는 여정이 바로 희망과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향한 여정이기 때문이다. 희망은 좋은 것이다. 우리는 대개 그 희망의 여정을 따라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 가능성의 여정을 따라갈 때, 우리는 여전히 살아 있고, 살아내려 애쓴다. 아직은 죽은 채로 살아 있고, 아직은 심연 아래 가라앉아 있더라도 말이다.
아버지는 망설임의 순간 당신이 했던 선택에 대해 늘 후회했다. 난 그 후회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는 게 싫었다. 후회의 이야기는 자기연민으로 이어졌고, 자기연민은 놀랍게도 자기과시로 이어졌다. 하기야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자기연민이란 ‘나르시시즘’에서 비롯되기 마련이고, 그러니 자기연민과 자기과시는 결국 등을 맞대고 있기 때문이다.
밥상머리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자기연민과 자기과시 이야기를 지루하게 듣곤 했다. 혼자 술병을 비우며, 때론 코를 훌쩍거리며, 때론 이야기를 극적으로 각색하며 자기연민의 서사극을 완성해 나가다, 아버지는 돌연 자기과시로 흥을 돋우기 시작했고, 그 흥이 다할 무렵, 마지막으로 ‘실패한 주식’이 되어버린 자식에 대한 한탄을 늘어놓았다. 어쩌면 그것은 망설임의 순간, 결과적으로 후회로 남은 선택을 한 인생에 대한 확증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망설임의 순간, 아버지가 선택하지 못한 그것은 희망이었을까, 욕망이었을까. 이제 와 알겠는 건, 아버지가 선택한 것이 희망의 여정은 아니었던 것 같다는 것 정도다.
문득 내 삶의 망설임들에 대해, 선택들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