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저 작은 존재일 뿐

세상과 타자와 삶에 대한 생각과 관점을 바꾸어야 할 때

by 식목제

관점 혹은 가치관의 차이 때문에 다른 현상이나 결과가 산출된다. 대부분의 일이 그렇다. 꽤 당연한 얘긴데, 뜯어보면 그로 인해 당연하지 않은 일들이 당연하게 흘러가기도 한다.


지금 일터에서 최근 제로웨이스트 챌린지 사업을 시작했다. 간단한 일이다. 7일 동안 제로웨이스트 실천을 하면, 기념품으로 제로웨이스트 키트를 준다. 물론 "저 실천했는데요!" 하면 그냥 주는 게 아니다. 세상에 거저 생기는 건 없다. '인증'을 해야 한다. 자신의 SNS나 카카오톡 채널 채팅창으로 실천 내용을 기재해 인증샷과 함께 보내야 하는 것이다. 다채로운 결과가 산출되고 있다. 4만 원 상당의 기념품에 눈이 어두워져 무늬만 흉내 내는 사람도 있다. 이를테면 텀블러 사진 달랑 하나 얹어놓고, 일회용 컵 사용 안 하기 실천했음, 하는 식이다. 평소, 기후위기나 에너지 문제, 플라스틱 소비 문제 등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기념품 준다니 일회성으로 참여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정반대쪽에 위치한 도전자도 있다. 온 가족이 해변과 마을에서 쓰레기를 줍는데, 매번 동영상을 찍어 얼마나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는지 인증한다. 물론, 이들도 '잘 보여주기' 위해 그럴 가능성이 없진 않지만, 최소한 이 프로그램의 실행 취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해본 사람일 확률이 높다. 동네 어른들한테 훌륭하다고 칭찬을 받았다며, 선한 영향력을 갖는 프로그램 같다는 후기까지 작성한 걸 보면, 비록 평소 심각한 고민을 하며 살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챌린지에 참여하는 관점이 앞선 사람과는 좀 다르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이보다 한 수 위인 사람도 있다. 이 조직의 사업 담당자들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짚으며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거다. 안 그래도 최근 엄청난 폭우를 보며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절감하고 있다고, 평소에도 조금씩 실천해오고 있다고, 이런 사업 참 좋은 것 같다고 공감하는 것이다. 그이는 제로웨이스트 키트를 수령한 뒤에도 일상에서 문제의식을 갖고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


문제의식의 핵심은 단순히 쓰레기를 줄이자는 게 아니라, 낭비를 줄이자는 거다. 인간은 지나치게 많이 소비한다. 아니 엄청나게 낭비한다. 한쪽에서 굶어 죽는 사람이 생겨도, 다른 한쪽에는 배가 찢어지게 먹고도 남아 버릴 정도의 소비가 이루어진다. 이를 위해 낭비되는 에너지도 만만치 않다. 여담인데, 난 먹방 포르노를 혐오하는 편이다. 대체 뭐하는 짓인지. 제로웨이스트 키트가 탐나 일회성 참여를 하는 이가 쓰레기 차원을 넘어 인류의 소비와 낭비 문제까지 인식의 지평을 넓혀갈 리는 없다. 아직은 소비가 대세다. 우리는 스스로 소비를 줄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아마 대부분 남 탓만 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은 그 정도는 아니라고 자위하면서 말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한두 사람 개인의 차원에서 보면 별것 아닐 수 있지만, 한 시대의 대세를 이루는 관점과 가치관의 차원으로 확장하면 사태가 녹록지 않아진다. 이토록 많은 소비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 일인데도, 당연한 일인 것처럼 흘러간다. 우리는 가난하게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난, 솔직히, 인류가 당장 망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한다.


몇 개월 전, 나는 대선 국면에서 젊은 세대의 젠더 갈등을 부추겨 매표 행위를 한 자들에게 분노를 표한 적이 있다. 인간은 복잡해 보이지만 실은 아주 단순한 동기로 삶을 추동해가는 존재이고, 이는 대체로 사적 욕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차별의 문제를 사적 욕망의 좌절 혹은 파이 뺏기 문제로 단순화시키는 것이 매표 행위자들의 주된 전략이다. 동등한 주체로서 여성의 권리 회복 문제는 오래된 역사 속에서 면밀하게 들여다보며 다루어야 할 사안인데, 이를 당장의 파이 쟁탈 문제, 이를테면 채용 시 여성할당제는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주장으로 단순화시키면, 대중의 마음을 간단히 현혹시킬 수 있다. 제로웨이스트와 기후위기, 지구의 멸망을 논하다가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 미안하다. 친절하지 못했다. 관점과 가치관, 그 이야기를 계속하려는 거다.


말이 나온 김에, 여성할당제를 간단하게 짚고 넘어가자면 일반 사기업에서 법으로 강제된 여성할당제 따위는 없다. 공무원 채용에 관한 것인데, 이마저도 여성 채용 인원을 보장하라는 여성할당제가 아닌 '양성평등채용목표제'다. 국가직, 지방직 공무원 채용에서 특정 성별의 채용 인원이 30% 미만으로 떨어지지 않게, 일정 합격선을 만족시키면 선발예정인원을 초과 합격시키게 한 제도다. 게다가, 양성평등채용목표제와 관련된 통계 기록에 따르면 이 제도로 인해 여성이 일방적으로 수혜를 본 것도 아니다.(<2020 공공부문 균형인사 연차보고서>에 따르면, 2003년부터 2019년까지 이 제도를 적용해 추가 합격한 인원은 지방직 공무원의 경우 남성 1898명, 여성 1317명이었으며, 국가직의 경우 여성 348명, 남성 211명이었다.) 하지만, 객관적 사실을 덮어둔 채, 국가가 '여성할당제'로 남성의 채용 기회를 역으로 박탈하고 있다고 단순화시켜 주장하면, 젠더 갈등을 부추기기 아주 좋은 소재가 된다.


지금은, 채용 시 여성이 더 많은 혜택을 보고 남성이 막대한 불이익을 보는 시대가 아니다. 준비된 서류상, 이른바 '스펙'상 수준이 동일하거나 비슷한 경우, 최종 면접에서 더 높은 합격률을 보이는 것은 남성이란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몇 년 전, 서울교통공사는 무기계약직 채용 시험에서 면접 점수를 조정해 합격선에 있는 여성 지원자 전원을 탈락시킨 적도 있다. 그런 위법 행위를 저지른 근거는 업무에 적응하기 힘들어 보인다는, 여성이 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희한한 논리였다. 난, 출판계에 있을 때, 결혼한 여성, 혹은 곧 결혼 예정인 여성은 채용하기 싫다고 말하는 사장을 여럿 봤다. 아이가 있으면, 혹은 아이를 낳으면 조직의 일을 꾸려가는 데 부담이 된다는 거였다. 되게 돌려서 말했는데, 실은 아이가 있으면 야근을 시키기 어렵고, 아이를 낳으면 육아휴직을 보장해야 하는 게 싫다는 걸 그럴듯하게 포장한 것뿐이다.


난 기업이 채용 시 출산과 육아 문제에 민감하게 굴고, 사회가 이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이 어처구니없는 관점과 가치관에 불편함을 넘어 분노를 느낀다. 이 사회는 오랫동안 여성이 사회의 하부구조에서 상부구조를 떠받치는, 게다가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조용히 순응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걸 당연시했다. 조금 거칠게 말해, 노동인구의 생산과 관리(출산과 육아)에 전념해 자본주의 시스템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라고 요구하면서도, 그것에 대해 어떠한 권리 주장과 대가 요구도 하지 말라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차용한 논리는 대부분 '모성과 가족에 대한 사랑'이었다. 하지만, 여성이 그저 노동인구의 생산 및 관리자가 아니라, 스스로 능력 있는 노동자가 될 수 있다고 천명했을 때, 자본주의 시스템의 상부구조에서 함께할 일원이 되겠다고 주장했을 때, 기득권자들은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 분명하다. 너희들은 우리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데, 너희들은 우리가 아무런 걱정 없이 세상을 지배하고 운용하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너희들은 우리가 낡아갈 때 새로운 구성원을 제공해주는 기계 역할을 해야 하는데…. 너희들이 우리들의 영역으로 진입하면 어쩌자는 거지? 그 모든 허드렛일을 팽개치고 우리의 밥그릇을 뺏어가겠다는 거야?


여성이 아이를 낳는 건, 모성과 가족애 때문이 아니다. 그저, 여성만이 아이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 세대를 낳을 수 있는, 이 생물학적 능력은, 종의 차원에서 보자면 매우 중요하고 특별한 능력이다. 종의 차원까지 갈 필요도 없다. 한 사회를 지탱하는 측면에서도 존중받아야 할 능력인 셈이다. 늘 고령화와 인구절벽에 대해, 사회 시스템의 붕괴에 대해 염려하는 척하지만, 실상 여전히 이 사회의 기득권을 쥐고 있는 자들은 이 특별한 능력에 대해, 이 특별한 능력을 품은 존재에 대해 진전된 의식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그이들이 종과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종과 사회의 계속성을 보장하는,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는 걸 인식한다면, '출산과 육아 문제 때문에 채용이 꺼려져요' 따위의 단세포적이고 너절한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개인의 차원에서 보자면 출산과 육아는 필수불가결한 일이 아니다. 또한 사회와 종의 차원에서도, 어쩌면 반드시 지켜내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있다. 더 이상 아이가 나타나지 않는 시대가 오고, 인류가 절멸해도, 괜찮다. 절멸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다만, 종과 사회를 지속해 가는 게 중요하다고 믿는다면, 기득권자들이 그렇게 믿는다면, 관점과 태도를 바꿔야 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관점을 바꿔 이런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종의 재생산과 계승이, 생물학적인 의미에서 종에게 가장 중대한 과제라고 가정한다면, 다음 세대를 품고, 낳고, 양육하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당연하게도 남성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야 한다. 그러니, 우리의 여성 족장은 이렇게 천명할 수 있는 것이다. "아들들아, 너희, 오직 가련한 씨 하나만을 넘겨준 아들들아, 종의 번성을 위해 너희는 무엇을 할 수 있느냐? 우리의 위대한 딸들이 생명을 잉태하고, 낳고, 기를 적에, 너희는 나가 공연히 힘겨루기를 하며 대장 놀이나 할 것이더냐? 경거망동하지 말라. 삼가라. 그리고 경배하라. 경배하고 나아가 생명의 양분을 취해오라. 그것으로 씨 하나뿐인 너희의 모자람을 채우라. 마땅히 해야 할 일로 명예를 얻으려 하지 말라. 부를 취하려 하지도 말라. 권력을 탐하지도 말라. 그저 경배하는 마음으로 정진하라. 강조하건대, 너희는 씨 하나뿐이지 않더냐. 그러니, 이름 앞에 너희를 세우려 하지도 말라. 우리는 위대한 딸들의 이름으로 영원토록 계승될 것이니라." 과학적으로도 타당한 얘기다. 생명 활동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미토콘드리아는 모계 유전이라 하고, 그런 까닭에 인류의 공통 조상을 추적하는 데 미토콘드리아가 활용된다고 한다.


기후위기로 세상이 망해도, 인구절벽으로 인류가 절멸해도, 괜찮다. 언젠가 말했듯, 우주적 차원에서 보자면 아무것도 아니다. 칼 세이건이 말했듯 지구는 '창백한 푸른 점'일 뿐이고, 인간은 푸른 점을 구성하는 무한한 픽셀 중 하나일 뿐이다. 다만, 다시 칼 세이건이 지적했듯 우리가 특별한 존재라는 망상에서 벗어나, 우리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인식하며, 겸손하게 살아갈 필요는 있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이 푸른 점 안에서, 살아 있는 한, 살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모든 것의 주인인 양 과도하게 소비하는, 낭비하는 태도를 삼가야 하는 까닭이, 마치 세상의 모든 권력은 제것인 양, 타자에게, 다른 성에게, 다른 계급에게, 다른 계층에게 조금도 양보할 수 없다고, 내것을 뺏어가지 말라고, 칼을 휘둘러서는 안 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관점을 바꿀 필요가 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작은 존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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