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와, 그날처럼

오늘은 비에 젖은 나무가 되고 싶어

by 식목제

아침 설거지를 끝내고 앉는다. 자정 무렵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계속되고 있으니, 오늘은 집에 있기로 한다. 빨래와 청소 따위는 비가 그치는 것으로 예고되어 있는 정오 이후에 하기로 하자. 지금은, 그저, 이렇게 내리는 빗소리에 취해 보기로 하자.(태풍의 직접 영향으로 피해를 보고 있을지 모를 남부 지역 거주민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어려서부터 비 오는 날을 좋아했다. 정확히는, 늘, 비 오는 날을 기다렸다. 9시 뉴스가 끝날 무렵 등장하는, 김동완 기상통보관의 '날씨 예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TV 프로그램 코너였다. 다음 날의 최저기온과 최고기온, 날씨 동향을 살피는 것이 무척 중요한 일과였는데, 매일 해야 할 일이라곤 기껏해야 학교에 오가는 것밖에 없는 어린아이가 왜 날씨에 그토록 관심이 많았는지 모를 일이다. 화면 속 지도 위에 이른바 '기압골'이라는 등고선을 그려가며 소개하는 날씨가 얼마나 근사해 보였는지 모른다. 세상의 좀 더 큰 진실에 다가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매일 일어나 접하는 바람과, 햇살과, 습기는 그저 우리 동네, 이를테면 춘천시 효자동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던 거다. 그 바람은 더 거대한 무엇과 연결되어 있었다.


다음 날, 비가 오거나, 흐리거나, 그도 아니면 최소한 아침에 짙은 안개라도 예고되어 있을 경우, 난 설레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곤 했다. 혹, 새벽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그 빗소리에 잠에서 깨어,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내리는 빗줄기를 놓치기 싫어 창문을 열어젖히곤 했다. 부러 얼굴을 내밀어, 바람결에 흔들리는 빗줄기를 맞아도 본다. 휴일인 것보다는 학교에 가는 날인 게 더 좋다. 비닐우산을 쓰고, 장화를 신고, 우산 위로 듣는 특유의 빗소리를 들으며, 물이 흥건한 길바닥을 찰박찰박 밟으며, 학교로 간다. 그런 날, 학교 수업 따위에는 집중이 되지도 않는다. 계속 교실 창 밖의 빗줄기를 보며 어서 마지막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비닐우산에 얽힌 추억도 많구나. 지금은 볼 수 없는, 대나무 살로 만든 반투명의 푸르스름한 비닐우산. 어느 날, 내가 사랑하는, 비가 오는 날, 비닐우산을 쓰고 학교에 간다. 얇은 비닐우산 머리 위로 쏟아지는 빗소리는 더욱 커다래지고, 마치 '입체 서라운드 음향'처럼 내 귀를 때린다.(당시 가정용 고급 오디오 시스템을 판매하는 회사들은 '입체 서라운드 음향'을 강조했다. 물론 그건 '사장님' 댁에서나 볼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학교에 도착해 교실로 들어서니, 한 여자아이가 투박하게 말한다. "창피하지도 않니?" 뭐가? 정말 뭘 물어보는 건지 몰라 잠시 동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요지인즉슨, 비닐우산이 창피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여전히 비닐우산을 많이 쓰는 시대였고, 아마 그날 나 말고도 비닐우산을 쓰고 온 아이들이 제법 있었을 것이 분명한데, 그건 좀 이상한 질문이었다. 집에서부터 비가 온다는 사실에 너무 들떠, 우산 위로 쏟아지는 빗소리에 취해, 비닐우산의 대외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심사숙고한 적이 없어, 그건 참으로 느닷없는 질문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말 그대로 이렇게 답했다. "응? 뭐가?"


여담인데, 그때 난 여자아이들에게 그다지 좋은 인상을 주는 남자아이가 아니었다.(물론 성인이 되어서도 사정이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지만.) 지금도 난,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여자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고, 그이들에게 짓궂은 장난을 걸지도 않았고, 내 몸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니었으며, 머리에 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그이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이를테면 비닐우산에 얽힌 일과 비슷한 에피소드들이 자주 일어났다는 것, 그리고 매년 봄, 반장을 선출하는 시기가 되면 여자아이들이 대부분 내게 투표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었다. 비밀투표 아니냐고? 맞다. 다만 최종 후보 2인으로 좁히기 전, 늘 (우리 학교에서는) 다수 후보에 대한 선호도 조사를 '거수'로 실시했기 때문에, 아이들 마음의 향방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때, 여자아이들은 대개 나와 함께 최종 후보 2인에 오르곤 했던 집주인 아들을 지지했다.


아무튼,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비가 오고 있었으니까. 비닐우산은 찢어지지 않게 잘 간수하기만 하면 된다. 흥에 겨운 나머지 비닐우산으로 칼싸움만 하지 않으면 된다. 사실, 모든 수업이 끝나고 나면 우산 따위는 필요 없어진다. 운동장에 나가,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놀 것이기 때문이다. 차가운 빗줄기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때리는 촉감, 몸과 빗물이 하나 될 때 터져 나오는 막대한 해방감, 맨발로 빗물과 흙이 뒤섞인 운동장을 뛰어다닐 때의 희열, 무려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그 느낌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빗속을 누볐다.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그날도, 난, 몇 시간째 물과 하나가 되어, 미친 아이처럼 운동장에서 뒹굴고 있었다. 퇴근하던 한 교사가 그런 나를 보고 꾸짖듯 말한다. "반장이라는 놈이 지금 뭐 하는 거냐? 빨리 집에 안 가?" 그 사나운 입이, 비닐우산에 대해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진 여자아이의 입과 중첩되어 보인다. 어린 내 마음에, 반장과 비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물론 교사에게는 상관이 있었겠지. 아, 그러고 보니, 그 여자아이도 그런 의미로 말한 거였을까? 반장이라는 놈이 비닐우산을 쓰고 오다니, 창피하지도 않니? 그런가? 하긴, 집주인 아들이었다면, 집주인 아들이 반장이었다면, 좀 더 근사한 우산을 쓰고 온 반장이었을 텐데.


성인기가 되어서도, 나의 비 사랑은 그치지 않았다. 신촌에서 집까지 두 시간 넘는 거리를, 비를 맞으며 걸어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비는, 발산되지 못한 채 그저 내 영혼만 태우고 있는 그 무엇을 서서히 식혀 주었고, 마침내 내 안으로 스며들어, 재가 되어버린 영혼이 눅눅한 풀처럼 습기를 머금을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면 조금은 안심이 되는 것이다. 내 안의 눅눅한 풀들과, 빗줄기로 가득 찬, 습기로 가득 찬 바깥 세상이 연결되어, 아무런 괴리감 없이 삶을, 세상을 용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때, 난 비로소, 푸르른 봄날, 죽기로 결심하는 이들이 더 많아진다는 말의 의미를, 존재 저 밑바닥에서부터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비가 오는 날에는 후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대학 시절, 자주, 신촌로터리를 지나 이대역 앞을 들러 가던 버스 노선을 이용하곤 했다. 이 노선을 타려면 약간의 수고를 해야 한다. 내가 살던 동네에서 갈현동 버스 종점 쪽으로 20여 분 걸어가야 그 버스를 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이대역 앞에서 학교 후문으로 이어지는 길은, 왼쪽으로 숭문고등학교 운동장을 바라보며 걷는, 오래된 은행나무와 플라타너스가 죽 늘어선 그 길은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오가는 사람이 드문, 그 길을 걷는 것이, 나는 참 좋았다. 그 길을 걸을 때 느껴지는 한없는 쓸쓸함을, 나는 참 사랑했다. 마침내 후문 앞에 도착하면, 난 어김없이, 마지막으로 서 있는 나무를, 나무의 등껍질을 가만히 쓰다듬곤 했다. 그에게 인사해야, 비로소, 조금은 안심하며 캠퍼스에 들어설 수 있었다.


지금도, 난,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예전처럼, 몇 시간이고 무작정 비를 맞는 일은 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가끔은 마당에 나가 살짝 비를 맞아본다. 여전히, 좋구나. 죽기 전에, 언젠가, 몇 시간이고, 다시 한번, 온몸으로 비를 맞아보았으면 좋겠다. 오래전, 건너 건너 지인이, 나의 존재만 아는 어떤 이가, 비를 맞는 걸 너무나 좋아한다는 내 이야기를 듣고는, 크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단다. "비를 왜 그렇게 좋아해? 자기가 무슨 나무야? 나무?"


내 마음에도 비가 내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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