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얼굴은 하나가 아니고,

슬픔이 있는 곳에는 사랑이 있으니

by 식목제

그해 가을 나는 살아온 날들과 살아갈 날들을 다 살아

버렸지만 벽에 맺힌 물방울 같은 또 한 여자를 만났다

그 여자가 흩어지기 전까지 세상 모든 눈들이 감기지

않을 것을 나는 알았고 그래서 그레고르 잠자의 가족들이장 끝내고 소풍 갈 준비를 하는 것을 이해했다

_ 이성복, <그해 가을> 부분


이 세상은 사랑하기에 알맞은 곳

난 이보다 더 나은 곳을 알지 못하네

Earth's the right place for love

I don’t know where it's likely to go better

_ 로버트 프로스트, <자작나무(Birches)> 부분




무슨 이야기를 하려다가, 잠시 들른 이웃의 글을 보다가, 문득 생각에 잠긴다. 난 최근 읽고 있는 《동물은 어떻게 슬퍼하는가》와 관련해, 무슨 말을 하려던 참이었다. 동물의 감정, 동물이라는 존재가 슬픔을 느끼는 방식에 대한 책이지만, 뒤집어보면 단지 동물이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끼느냐 마느냐, 느낀다면 어떻게 느끼느냐에 대한 이야기를 너머, 살아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슬픔과 고통을 딛고 어떻게든 살아내려 한다는 것, 따라서 각 개체와 종의 슬픔에 대해 주목하는 이유는 결국 그들의 존재 자체와 삶의 방식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미로 다가오기도 한다. 물론 이는 나의 생각이다. 저자가 그렇게 단정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책, 좀 더 정확히는 과학적 글쓰기를 하는 책의 장점은, 관찰하고 수집한 데이터를 근간으로 한 나름의 객관적 사실 전달을 넘어 무리한 주관적 주장을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따라서 그 사실들을 취합해, 내가 위에서 그랬듯, 나름의 재해석과 2차 논지를 전개하는 건 각자의 몫이 되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은 살아 있으려 한다. 물론 삶은 부조리하다. 실은, 벌레가 된 그레고르 잠자가 아니라, 그이가 추하고 쓸모없는 벌레가 되었다고 믿는 세계가 부조리한 것이고, 아이들이 나무를 타서 자작나무 가지가 휜 것이 아니라, 폭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휜 것뿐이라 단정하는 현실이 부조리한 것이지만, 삶이 부조리하다 해서 삶을 간단히 외면하거나 저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부조리하지만, 살아가기로 한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것은 어떻게든 살아 있으려 하고, 지금 살아 있는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세계는, 우리가 사랑하며 살아가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믿는 세계는, 바로 여기, 이 세상뿐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이 공간에서 언급한 허수경의 시 <우산을 만지작거리며>에서도 그랬듯, 우리는 이토록 부조리한 삶 때문에 종종 살고 싶지 않다 말하지만, 죽고 싶다 생각하지만, 실은 살고 싶어서, 어떻게든 살아 있고 싶어서 몸부림친다. 그런 까닭에, 그이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할 고백을, 구태여 심리상담사에게 털어놓았던 것이다.

불투명한 유리가 끼워진 대기실도 대기실에 붙여둔 자살 위험이 있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특징에 대해서도 내가 읽어보면 그들은 다 살지 못해서 안달한 사람인데 심리상담사의 꼬임 혹은 그의 인턴이 건네주던 하얀 줄이 박힌 푸른 사탕 때문에 나처럼 고백을 한 사람들일 뿐인데
_ 허수경, <우산을 만지작거리며> 부분


슬픔과 불안, 우울은 아이러니하게도 살아 있기 위한 생명 반응이다. 《동물은 어떻게 슬퍼하는가》에서 과학자들이 동물들의 감정, 그들의 슬픔을 인식할 수 있는 까닭도, 고양이들이, 개들이, 말들이 스스로 상실에서 오는 고통을, 아픔을, 슬픔을 표정으로, 소리로, 행동으로 표출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고통을 알아달라, 이대로는 죽을 만큼 힘겹다 호소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생명 반응에 대한 개체 자체의, 그리고 개체 주변의 대응이다. 슬픔과 우울이 물밀듯 밀려올 때, 식음을 전폐하고 동굴 같은 둥지에 몸을 웅크린 채 서서히 생명력을 잃어가는 존재도 있다. 반면, 주변에 신호를 보내고, 다른 벗들을 찾아 온기를 나누며 스스로 치유의 행위를 하는 존재도 있다. 또한 그들의 생명 반응을 즉각적으로 알아채고, 손을 내밀며, 살아 있으라, 어떻게든 살아 있으라 곁을 내어주는 존재들도 있다.


책에서 주장하는바, "슬픔의 얼굴은 하나가 아니"다. 또한 다시 저자가 말하는바, "슬픔이 있는 곳에는, 사랑이 있"다. 이상한 말이지만, 슬픔과 고통의 근원에는 사랑이 있다. 우리는 존재를, 관계를, 세상을, 삶을, 실은 사랑하기에 슬픔에 빠지고 고통을 느낀다. 또한, 누구나 개별적인 우주로서, 각자의 질서에 따라, 각기 다른 슬픔을 느낀다. 슬픔의 얼굴은 다르고, 그렇기에 우리는 자기 존재의 슬픔에만 함몰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다른 종의, 세상의 슬픔을 응시하고, 교감해야 하는 것이다. 슬픔에도 '연대'의 가치가 스며들 수 있으며, 서로 다른 얼굴을 한 슬픔이 연대할 때, 우리는 좀 더 넓은 품을 가진 존재로 살아 있기 위한, 살아내고자 하는 존재의 몸짓을 좀 더 따뜻하게 안아주기 위한 한 걸음을 뗄 수 있다. 어쩌면 글쓰기도 그런 연대의 행위 중 하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레고르 잠자의 가족이 소풍을 떠나는 것은 부조리해 보일 수 있지만, 부조리한 세계에서 그이들이 감당해야 할 삶, 그이들이 이겨내야 할 슬픔은 또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러니, 시인이 벽에 맺힌 물방울 같은 여자, 언제든 흩어질지 모를 사랑을 만나, 다시 살아가기로 한 것처럼, 그들도 매장을 끝내고 소풍을 떠나며 다시 삶을 살아내기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이 같은 시에서 말했듯, "아무것도 미화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비하시키지도 않는 법을 배"우며, 삶을 살아내기로 하는 것이다.


내 이웃은 그레고르에게 로버트 프로스트의 <자작나무>를 '바친다.' 그이가 그레고르에게 시를 헌정한 마음을, 난 모른다. 내가 알겠는 건, 삶의 어느 날 자작나무 가지에 오른 영혼도, 삶의 어느 날 모진 눈보라에 자작나무 가지를 휘게 한 영혼도, 다 그이의 영혼이라는 것, 살아 있는 것이 사는 일이란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일이라는 것. 삶이란 그토록 비정하고 무참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눈보라가 그치고 다시 봄이 오면, 어린 영혼은 자작나무에 올라 사랑을 하고 삶을 향유하리라는 것. 그것이 바로, 살아 있는 것이 고통과 슬픔을 이기고 기어코 살아내는 방식이라는 것.


태풍이 온다. 그 거대한 비바람이 또 얼마나 많은 존재들을 할퀴고 지나갈까, 염려하다가, 문득, 우리 삶도 그러하지, 생각한다. 내 삶에도, 때론 크고 작은 비바람이, 때론 크고 작은 지진과 해일이 휩쓸고 지나갔다. 한때는 폐허가 된 나날들도 있다. 그럼에도, 다시 살아가는 것이다. 오는 추석에는, 소풍 가는 마음으로, 맛난 도시락을 싸서, 아버지를 만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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