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를 응시하며 삶을 짓는 일
인간으로 존재하며 그 무엇으로 살아가든
이것은 부모 되기에 대한 이야기도, 양육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존재에 대한 이야기다.
부모가 된다는 것, 좀 더 정확히는 누군가의 부모로 살아간다는 것은 꽤 쉽지 않은 일이다. 뻔한 이야기지만, 부모가 되는 그 누구든 사실상 그 일을 처음 해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둘째나 셋째를 키우는 건 좀 다르지 않을까요? 첫아이를 키워봤으니까요. 언뜻 들으면 말이 되는 소리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아이는 획일화된 시스템으로 생산되는 AI 로봇 같은 존재가 아니라서, 첫째와 둘째와 셋째와 .... 가 다 다른 존재인 데다가, 한 아이를 키우는 것과 두 아이를 키우는 것과 세 아이를 키우는 것과 ..... 은 완전히 차원이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아이 몇을 키우든, 부모로 살아간다는 건 매 순간 처음 겪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내 부모나 인생 선배가 해주는 조언 따위도 결정적인 도움은 안 된다. 부족하고 불완전한 존재로서 내가 어떤 존재일지 예측할 수 없는 아이를 양육하는 일은 오롯이 나의 경험, 나의 몫이기 때문이다.(물론 오은영 박사의 조언이 많은 이들에게 빛이 되어주고 있을 거라 믿는다. 전문가의 조언을 귀 담아 들을 필요는 있다. 다만, 아이를 키우는 건 결국 당사자, 즉 부모 자신이라는 얘기다.)
부모 되기, 양육하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그런 이야기를 풀어놓을 만큼 훌륭한 아버지였다고 생각지 않는다. 반대로, 쓰라린 실패담을 풀어놓을 만큼 완전히 형편없는 아버지도 아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매일, 매주, 매월, 매년 시시각각 주어지는 양육의 과제를 수행하며, 부족한 부모를 잘 감당해주는 고마운 아이와 함께 짧지 않은 시간을 걸어왔을 뿐이다.
아이들은 대체로 부모보다 더 큰 영혼의 그릇으로 부모를 안아준다. 하지만 부모는 때로 어른으로서 이겨내야 할 숱한 과제들 속에서 힘겨워하느라, 실은 아이가 우리를 품어 안으며 이끌어주기도 한다는 걸, 우리가 삶의 도정에서 굳건히 땅에 발 딛게 해준다는 걸 잊을 때가 있다. 그러니, 어쩌면 아이를 양육할 때, 아니 아직 우주로 열려 있는 아이라는 존재와 함께 살아갈 때, 부모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그 아이를 잘 느끼고, 이해하고, 알아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너무나 현실과 맞지 않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일 수도 있다. 출생 이후, 가만히 누워만 있다가, 겨우 뒤집다가, 기어다니다가, 서다가, 걸어다니다가, 뛰어다니다가, 이제 좀 사람 같아졌다 싶으면 생각지도 못한 온갖 과제들을 안겨주는 아이를 온 마음을 다해 온몸으로 부딪혀본 부모라면, 되지도 않게 철학적인 척하는 지껄임에 코웃음을 칠 수도 있다. "네가 뭘 몰라서 그래. 네가 게맛을 알... 아니, 네가 애 키우는 게 뭔지나 알아?" 맞는 말이다. 사관학교에서 전쟁에 대해 배우는 것과 실제 전투에 참전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선글라스를 낀 채 전쟁 명언이나 지껄이는 사람이 총알이 빗발치는 전선에서 낮은 포복으로 전진하는 병사의 마음을 알 리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이를 잘 느끼고, 이해하고, 알아보는 일에 대해 말하는 까닭은,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단지 매일매일 전쟁 같은 양육 과제를 완수하는 것만으로는 늘 부족하기 때문이다. 아이의 생존과 성장을 책임지는 것 외에도, 나와 다른 존재로서, 엄밀히 말해 타자로서 아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의 많은 부모가 그랬듯, 또 우리가 여전히 그러듯, 몇 년 전 방영했던 드라마 제목처럼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그저 '가족'이라는 이름만 달고 사는, 뒤집어 말하면 '가족'임에도 남보다 '아는 게 별로 없는' 관계로 사는, 그리하여 부모는 최선을 다해 키웠다 항변하고 싶어 함에도 정작 아이는 사랑받지도 이해받지도 못했다 결핍을 느끼는 애처로운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부모가 성장하는 존재로서 나를 느끼고 이해하고 알아보는 경험, 성장하는 존재로서 나를 수용하고 안아주는 경험을 하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한 존재를 건강하게 성장시키는 밑거름이 될 뿐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후일 어른으로서 살아가는 한 존재의 자기이해 및 자기존중감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나아가 스스로 부모가 돼 아이를 양육할 때 갖춰야 할 마음과 영혼의 깊이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부모로부터 충분한 이해와 수용과 긍정의 경험을 하지 못했다고 해서 자신의 아이를 잘못 키우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건강하게 성장한 사람보다 더 막대한 숙제를 스스로 풀어 나가야 한다는 전제하에, 그 길고도 험난한 분투의 여정을 기꺼이 감내한다는 전제하에, 아무리 결핍되고 상처받은 영혼이라도 누구나 더 나은 존재로 살아가며 더 나은 양육자가 될 수 있다. 난 그렇게 믿는다.
살아오며, 그렇듯 상처받는 영혼을 딛고 훌륭한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적잖이 목도해 왔다. 난, 그런 존재들을 이곳 글 공간에서도 목격한다. 물론 누군가의 지적처럼, 글 몇 줄로 그 존재의 뒷모습을 모두 안다 할 수 없지만, 행간에서 느껴지는 아우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은, 그이들이 최선을 다해 건강한 존재로 살아가려 한다는 것, 그리고 이미 건강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럼에도, 존재의 육신은 고장 나고 병들어 가며, 존재의 영혼은 낡고 닳아 간다는 것이다. 존재하는 누구나 그 무게를 견뎌야 한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은, 막대한 존재의 무게를 안고도 살아 숨 쉬려 하는 존재의 생명력에 대한 찬사다. 막대한 무게감을 끊어내려 하지 않고, 당장 무화되려 하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내려 하는 존재의 희망에 대한 헌사다.
그러니, 사실 여기서 난, 부모 되기의 어려움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부모 되기는 당연히 어렵다. 결핍된 존재가 불완전한 존재를 양육하는 일이 어찌 간단할 수 있겠는가. 부모로 살아가는 일이라는 화두는 기실 책임 있는 존재로 존재하는 삶에 대한 메타포일 뿐이다. 본질은 존재에 있다. 우리가 해야 할 가장 큰 일은 존재에 대한 응시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단지 타자로서 아이에 대한 응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자기 존재에 대한 응시, 다른 존재들과 관계 속에서 존재함에 대한 응시이며, 그렇듯 오롯이 집중해 존재를 들여다보는 과정이 결국은 우리의 삶을 만드는, 삶을 짓는 일이라는 얘기다.
존재를 응시하며 삶을 짓는 일, 어쩌면 그게 다일지도 모른다. 인간으로 존재하며, 부모로, 자식으로, 형제자매로, 친구로, 동료로, 선후배로, ..... 로 살아가는 그 모든 일들이 말이다. 그 무엇으로 살아가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