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의 노래》에 부쳐
2010년, 어머니의 시집 《코스모스의 노래》 맨 뒤에 실은 해설을 여기 기록한다. 어머니가 등단한 작가는 아니었으니, 해설은 그냥 내가 썼다. 당신의 칠순에 바치는 시집이었다. 그때만 해도, 어머니는 생체 활력이 남아 있었다. 간질환과 당뇨 문제를 안고 있었지만, 아직 치매 발병 이전이었고, 아버지와 종종 나들이도 했다. 난, 이 시집을 만들 당시, 최근 파주에서 발견한 일기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만약 알았다면, 1960년대 시가 더 포함되었을 것이고, 작품 해설의 내용도 바뀌었을 것이다. 물론 불가능한 일이었다. 생전의 어머니가 그 처연하고, 참혹하기까지 한 기록을 보여주었을 리 없다.
시집 해설이다 보니, 글이 길다. 나누어 올릴까 하다가, 그냥 전문을 통째로 기록한다. 어차피, 이 기억의 공간에 잠시 보관해둘 요량으로 올리는 것뿐이다. 어머니가 시집을 받아 들던 날이 생생히 기억난다. 약간 멋쩍어하며 웃던 모습도.
시인 신경림은 ‘좋은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삶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시’라고 답한 적이 있다. 또한 그 삶에 대해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시라면 더욱 좋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물론 문학이라는 것이 어느 장르이든 삶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삶을 정돈하여 잘 갈무리해 질서 정연하게 늘어놓은 것이 산문이라면, 시는 삶의 이야기들을 때론 응축하고 때론 생략하고 때론 해체해 노래 부른 것이다. 그렇다. 삶을 노래 부르는 것이다. 노래를 부를 때 느끼는 절절한 감정을 우리는 시를 읽으며 느낄 수 있다. 그 행간과 배경에 숨어 있는 삶의 기쁨과 슬픔에 공명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선우 시인의 첫 시집 《코스모스의 노래》는 삶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70년이라는 긴 삶과 함께 춤추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춤은 신명 나는 축제의 춤사위라기보다 느린 엇박자의 애잔함이 서려 있는 춤이다. 바로 도저한 恨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詩는 恨이 응축되고 해체되는 시공간이다. 시인은 애달픈 한을 안고 사는 사람들의 삶을 ‘환자’의 삶이라 말한다.
세월이 가면 다시 사람들은 환자가 된다.
생명의 유한함을 잊고 사는 한
우리 모두 환자일 뿐
_ <이 세상은 거대한 병원> 부분
‘생명의 유한함을 잊고 사는 한’ 우리는 모두 환자다. 시인에게 이 통렬한 진실은 너무 가슴 절절한 일이다. 왜냐하면 많은 이들이 이 진실에 고개를 돌린 채 스스로에게 때론 타인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언젠가는 대자연의 품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진실을 가슴 깊이 받아들인다면 삶에 대해 사람에 대해 좀 더 겸손하고 자애로운 시선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땅 위의 삶은 그리 녹록지가 않다. 따라서 시인의 마음에는 때로 겨울바람이 분다.
영주 가는 기차 속에서
차창 밖으로 스치는 빈 들판의 모습은
허허로운 내 가슴 같다
_ <자녀 유감> 부분
시인의 가슴속에 부는 겨울바람은 ‘빛나던 봄/ 자신만만하던 여름/ 그 값진 세월은 풍장 속에 보내고’ ‘스산한 가을/ 앙상한 가지에 메마른 나뭇잎’만 걸린 현실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현실은 어느 날 느닷없이 던져진 것이 아니라 수십 년이라는 삶의 강을 건너 켜켜이 쌓인 모래들처럼 시인의 삶에 누적되어온 것이다. 그 강 너머 먼 곳에는 코스모스 같던 시절의 꿈과 향수가 남아 있다. 그것은 빛나던 봄의 꿈이고, 자신만만하던 여름의 향수이다. 시인은 그때 구름 띄우는 소년과의 애틋한 사랑을 키우며 미래를 노래하고 있었다.
새싹 따라 봄이 오던 날
그는 하얀 나비가 되었습니다
뭇 꽃이 미소 짓는
마을 뜨락이 그리워서
코스모스는 연분홍 미소
哀愁에 찬 눈매가 고왔습니다
(…)
코스모스는
버얼써 사랑의 향기를 보았다고
소년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안은 채
다시 구름을 띄우기 시작했습니다
_ <구름 띄우는 소년> 부분
이 시집에는 시인이 50년 가까운 인생을 함께해온 남편의 시도 몇 편 실려 있다. <구름 띄우는 소년>도 그이가 열여덟에 시인에게 보낸 연서에 담은 시다. 첫 시집에 그이의 시가 함께 실린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그이는 시인의 삶의 이유이자 시의 모티프였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이와 함께 삶이라는 거대한 물줄기를 함께 헤엄쳐 오며 희로애락을 나누었다. 시인의 마음속에 부는 수많은 상념과 바람들은 결국 꽃 같던 시절부터 그이와 함께 헤엄쳐 온 거대한 강물 속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사랑 하나만 믿고 시작한 그 삶은 참으로 처절한 것이었다. 그 질곡의 시기 동안 시인의 작품은 중단되었다. 1959년 연애시절에 쓴 시를 끝으로 작품이 중단되었다가 1981년에 이르러서야 다시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이 시기 동안 시인에게 어떤 삶의 흐름이 있었는지 우리는 시를 통해서는 접할 길이 없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시인은 1985년에 그동안의 삶을 돌아보는 에세이를 한 편 남겼다. 바로 <밤이 지나면 다시 아침이>라는 작품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인은 詩作 활동을 중단한 그 시기를 ‘밤’으로 표현하고 있다.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양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성사시킨 결혼생활의 현실이 가져다준 고통스러운 시기였던 것이다. 그때 시인은 명문대에 합격하고도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직업인의 길을 택했던 남편에게 불만만 표출하고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는 무능한 아내인 자신을 자책하기도 하고, 장밋빛 미래를 꿈꾸었으나 그와는 너무나 다른 현실 속에서 “이런 건 아니었는데, 정녕 이런 건 아니었는데, 정녕 오랜 세월 가슴 태우며, 눈물을 뿌리며 얻은 사랑이 과연 이런 것이었나?” 회의하며 서러움에 눈물 흘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시인은 또 한 번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다시 아침이’ 오리라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그리하여 에세이 말미에서는 “남은 생애에 조그만 소망이 있다면 우리 가족이 편안히 살 수 있는 조그만 집을 장만하여 작은 뜰에 예쁜 꽃들을 심고, 건강한 몸으로 삶을 감사하며 살 수만 있다면 더 이상 아무 바람도 없을 것 같다”는 소박하지만 희망에 찬 메시지를 남긴다.
시인은 삶에 대해 한과 슬픔을 느끼면서도 근본적으로 따뜻함과 희망의 시선을 놓지 않으려고 한다. 시인의 작품에 유난히 자연을 예찬한 작품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가을의 요정 코스모스가
무리 지어 소담스럽게
설악 가는 긴긴 길에
꽃길로 피어났다
너무 아름다워
너무 사랑스러워
난 그만 나비 되어
꽃밭에 사뿐 내려앉았다
_ <코스모스 피는 계절> 부분
또한 <가을빛 우정>이라는 시를 보면 “친구야/ 저 단풍 좀 봐/ 그냥/ 아름답다고/ 하기엔/ 너무나 벅찬/ 저 요염한 자태를 봐” “친구야/ 발길을 멈추고/ 우리/ 그냥/ 단풍이 될까?”라고 노래한다. 시인은 그냥 ‘나비’가 되고 ‘단풍’이 되고 싶다. 그이는 자연 속에서 삶의 따뜻함을 다시 본다. 물론 그 이면에는 인간 삶에서 초월하고 싶은 절절한 마음이 숨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시인은 나무와 풀과 꽃들을 통해 삶을 긍정하고자 애쓴다. 또한 그것은 삶과 분리된 자연이 아니라 사람들과 온기를 함께 나누고픈 따뜻한 품으로서의 자연이다.
단풍처럼
곱게 내리는 햇살
코트 깃을 세우고
모자 살짝 눌러쓰고
사각사각
낙엽 밟으며
그와 함께 걷고 싶다
_ <걷고 싶다> 부분
시인은 걷고 싶고 때론 날고 싶다. ‘가족사’란 무게에 짓눌려 힘겨울 때마다 시인은 그렇게 자연을 꿈꾸었던 것이다. 하지만 새장 속에 갇혀 있는 새의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새장 속의 새>라는 시에서는 “안 돼, 안 돼, 우린 집 속에서만 살아서/ 밖에 나가면 살 수 없어” “생각해보니 슬픈 일이구나/ 우리들이/ 새장 속의 새가 되었다는 건”이라고 자조 섞인 한탄을 한다. 그럼에도 삶을 끝까지 긍정하고자 하는 시인의 마음은 결코 힘을 잃지 않는다.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한 거야” “그러고 보니 행복한 게 또 있어/ 때마다/ 마음 착한 우리 주인이/ 맛있는 걸 많이 주는 걸/ 시원한 물/ 맛있는 곡식/ 싱그런 야채” “그래 그래/ 우린 행복한 거야” 어쩌면 시인은 ‘이미 행복한 것’이 아니라 ‘행복해지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우린 행복한 거’라고 믿고 싶어 한다.
시인이 자연 속에서 마음의 위안과 힘을 얻는 것은 본래 자연이 지닌 ‘생명력’ 때문이다. 겨울이 되면 꽁꽁 얼어붙었다가도 봄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생명이 약동하고 여름에는 찬란하게 피어나고 또 가을이 되면 아름답게 물드는 바로 그 자연 말이다. 그 속에서는 세월의 무상함을 잊고 누구나 약동하는 생명의 일부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단풍>의 詩作 노트에서 볼 수 있듯이 노년의 친구들을 ‘그 어른애들’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미 눈꽃 같던 소녀 시절은 지났지만 아이처럼 약동하는 ‘어른애’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세월은 거스를 수 없다. 시인은 자신도 세월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코스모스의 시절은 가고 이제 노을 꽃이 피는 시절이 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눈꽃 맞으며
노을 꽃 세 女人, 명동길 걷는다
어디라 정한 곳 없이
젊은 시절 추억을 더듬으며
이 길도, 저 길도 기웃거린다
레스토랑, 카페, 뮤직홀
어느 곳에도 노을 꽃은 없다
황금 꽃, 붉은 꽃, 싱싱한 초록 꽃
그들의 옆 모서리
노을 꽃은 갈길 몰라 방황한다
_ <노을 꽃> 전문
노을 꽃은 갈 길 몰라 방황한다. 이 작품의 詩作 노트에는 “그 옛날, 쎄시봉과 돌체를 생각하며”라고 적혀 있다. 코스모스 시절 그이들이 차를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삶과 미래를 꿈꾸었던 곳이다. 누구에게나 삶은 단선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개인으로서 찬란하게 꽃 피우고 싶은 삶과 가족으로서 책임지고 짊어져야 할 삶이 오버랩되어 복합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서 삶은 때로 무겁고 슬프다. 시인에게 그 삶은 어머니이자 아내로서 존재해왔다. 안타깝게도 그 속에서 하나의 여자로서 코스모스 소녀가 꿈꾸었던 쎄시봉의 추억은 노을 꽃처럼 아스라이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노년의 시인도 한때는 여리고 작은 소녀였다는 것, 그것이 시인으로 하여금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어린 시절 당신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한다.
한가위 오면
엄마는 옥색 치마저고리를 입으셨지
그 자태 하도 고와
난 그만 엄마 치마폭에 얼굴을 묻었지
엄마에게선 솔잎의 향기가 났어
솔잎 한 켜 놓고
날 송편 예쁘게 얹고
송편이 익으면서 솔잎 향기가
엄마에게로 갔던 거야
달큰한 송편 먹고 나면
엄마는 영롱한 달빛 치마폭에 담아
한없는 사랑으로 내 몸 가득히
달의 정기를 넣어주셨지
올해도 한가위는 또 왔는데
눈부시던 옥색 치마저고리 고운 엄마는
말없이 은하수에 앉아
웃고만 있네
_ <어머니 2> 전문
시인은 노년에 접어들어, 돌아가신 어머니의 노년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이의 젊은 시절과 그 젊은 엄마의 치마폭에 얼굴을 묻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그것은 어쩌면 사연 많은 세월을 온몸으로 견뎌낸 한 사람이 생애를 돌아보며 찾게 되는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른다. 따뜻하고 안전했던, 그리고 그 품 안에서 엄마 냄새처럼 향긋한 꿈을 꾸었던 어린 시절 말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 시를 읽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것은 나의 어머니인 시인의 삶에 대한 슬픔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또 언젠가 내가 기억하게 될 어머니의 젊은 시절과 그 품에 안긴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한 애잔함 때문이기도 하다.
세월은 간다. 하지만 세월이 간다는 것은 단순히 세대가 이어지고 삶이 명멸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 우주에서 아주 작은 존재로 태어나 역사 속에 기록되는 삶을 살지는 않았을지라도, 누구나 삶 안에서 뿌리내리고 생장하고 열매를 맺기 위해 분투해간다. 그리고 그 지난한 삶의 발자국 하나하나가 전체를 만들고 우주를 만든다. 그것은 인간의 삶이 단지 유한한 생명 속에서 세월의 흐름을 따라 늙어가는 것에 그치는 것만은 아님을 알려준다. 그렇기에 세월이 지나도 시인의 영혼은 여전히 아름다운 봄날을 꿈꿀 수 있다.
개나리는 생긋생긋 쫑알쫑알
벚꽃님은 함박 함박 하하 호호
호수님은 조용조용 살랑살랑
해님은 반짝
아 찬란하게 아름다운 봄날의 잔치
몸은 겨울 황혼인데
마음은 아직 아름다운 봄날이구나
_ <마음의 봄날> 전문
2009년 봄날에 쓴 이 시에서 시인은 여전히 생명의 긍정, 삶의 긍정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이제 2010년을 맞아 시인은 이렇게 첫 시집을 내놓았다. 비록 칠순의 나이에 내놓은 첫 시집이긴 하지만, 새로 오는 봄에도 시인의 마음에 찬란한 시적 영감이 계속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하여 마음과 영혼의 봄날이 꽃 피는 코스모스의 노래가 언젠가 울려 퍼지기를 고대하고 또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