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이라기보다 강제 이주

생존을 위한 분투는 계속된다

by 식목제

# 1 _ 실패한 현실도피


내가 처음 ‘귀농’을 입에 올리기 시작한 것은 대학을 졸업할 무렵이었다. 당시 연인 관계였던 아내와 졸업 후 진로에 대한 이야기를 참 많이 나누었는데, 결론은 귀농이었다. 당시에는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야 할 이런저런 이유들을 갖다 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다 핑계였다. 취직할 자신이 없었던 거고, 설령 취업한다 해도 직장생활을 해나갈 자신이 없었던 거다.


자신을 속이면서 밀어붙인 일이 잘 굴러갈 리 없다. 시골로 내려간 지 1년 만에 서울로 돌아왔다. 그런데 실은 귀농도 아니었다. 난 서울이 고향인데 뭘 어디로 돌아간단 말인가. ‘현실도피성 이주’ 정도가 적당한 평가일 것이다.


# 2 _ 그래도 여전히 귀농


그래도 그 도피 행각은 내게 아주 강렬하고 긍정적인 경험을 각인시켰다. 농사일은 비록 힘들지만 즐거웠고, 답답한 서울을 벗어난 시골 생활은 아름다웠다. 서울로 돌아오면서 나의 인생 목표는 말 그대로 ‘귀농’이 되었다. 이제는 ‘돌아간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현실은 무거운 법. 아이가 태어났고, 막 들어간 출판사 벌이는 적었으며, 기왕에 갖고 있는 자산도 전무했다.


당연한 일이다. 졸업하자마자 시골로 갔는데 뭐가 있었겠는가. 그러니 사실상 귀농은 목표가 아니라 점점 ‘헛된 꿈’이 되어 갔다. 웃긴 것은, 답답한 마음에 찾아간 ‘용하다는 사주 역학 점술가’가 귀농은 ‘일장춘몽’ 같은 거니 포기하라고, 당신 사주와 맞지 않는다고 일침을 날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 3 _ 헛된 꿈을 위한 딴 짓


이후 20년 가까이 출판사를 다니면서도 그 헛된 꿈에 대한 딴 짓은 계속됐다. 귀농운동본부의 귀농학교를 다니고, 화천에서 진행한다는 장기현장귀농학교에도 참석하고, 거기서 만난 동기들과 진안으로 무작정 가 귀농 아닌 귀농 생활까지 했다. 아내가 무척 괴로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나의 행각은 우리가 이곳 고성으로 이주해 와 사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음에 분명하다. 한 분야의 전문가로서 아내의 커리어로 볼 때, 아내는 굳이 지금 고성에 와 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적인 이유가 있긴 했다. 우린 자산이 부족했고, 2년마다 전셋집을 옮겨 다니거나 전세비를 올려줘야 하는 일에 지쳐 있었다. 지쳐 있었다는 말도 고상하다. 그냥 돈이 부족했다. 남편이 다른 직업에 비해 무척 적은 연봉을 받는 일을 해온 데다, 그것도 모자로 중간 중간 딴 짓까지 하게 되면, 자산은 모이지 않는다.

게다가 난 마지막 출판사를 나온 이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었고, 하필 그 해에 아이를 재수까지 시키고 있었다. 다행히도 재수의 결과는 좋았지만, 우리에겐 전세비를 더 올려줄 만한 돈이 남아 있지 않았다. 수년 전부터 아이를 대학에 보내고 나면 서울을 벗어나자는 이야기를 해오긴 한 터였고, 기왕이면 장인장모가 10여 년 전부터 거주하고 있는 고성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는 게 결론이었다. 사실상 귀농이라기보다는 엄혹한 현실에 따른 강제 이주의 성격이 강했다.


# 4 _ 강제 이주 혹은 새로운 정착


아내는 자신의 커리어를 활용할 수 있는 직장을 고성에서 얻기 위해 1년 전부터 준비해 오고 있었고 결과는 좋았다. 문제는 또 나였다. 난 고성에서 내 경력을 살려 할 만한 일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취미로 갈고 닦은 별다른 기술이 있지도 않았다. 게으른 놈이었던 거다.


그러면 농사? 아니다. 난 땅도 없고, 농사 기술도 없다. 그동안 귀농학교에선 뭘 배운 건가. 핑계라면, 편집인학교 과정을 이수했다고 해서 바로 뛰어난 편집자가 되는 건 아니다. 정말 바보 같은 핑계다. 그럼 바닷가니까 배를 타는 건? 안 된다. 뱃멀미를 아주아주 심하게 하는 터라 관광용 배도 타지 않는다.

결국 몸으로 때우는 게 상책이다. 우연한 기회에 목재소 일자리를 소개받았고, 그렇게 인테리어 목재 배달 및 각종 노역의 삶이 시작되었다. 그게 고성 강제 이주 혹은 새로운 정착의 서막이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