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판 인쇄본의 추억

책에 대한 애틋함을 기억하다

by 식목제

# 1 _ 활판 인쇄본을 추억하다


내게 ‘책’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이삿짐이다. 포장이사라는 것이 생긴 지 오래되긴 했지만, 나는 이사를 할 때마다 노끈이며 신문지를 챙겨서 손수 책을 싸곤 했다. 이삿짐을 챙겨 주시는 분들을 못 믿어서가 아니다. 오래된 내 책들을 꺼내 보는 재미가 꽤 쏠쏠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제 좀 버릴 때도 되지 않았나 싶은 녀석들을 골라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대적으로 책을 처분한 건 경기도에 살다가 서울로 진입하게 되었을 때인데, 집이 좁아지다 보니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던 탓이다. 계속 갖고 있었다 해도 꺼내 보지 않을 책들이 대부분인데,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뒷맛이 씁쓸하다. 헌책방에 가서도 구하기 어려운 절판된 책들이거니와 이제는 사라진 활판 인쇄본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옛날 아재’ 소리 듣기 딱 좋은 말이겠지만, 난 요즘 시집에서 예전 활판 인쇄본을 통해 느꼈던 감칠맛과 여운을 느끼기가 어렵다. 같은 시어인데도 다르게 느껴진다고 하면 과장일까?


가장 속상한 건 뭐니 뭐니 해도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활판본을 잃은 것이다. 20대 내내 마르고 닳도록 부둥켜안고 지낸 시집이니 이사할 때 버린 것은 아니고, 지금은 고인이 된 형에게 선물했던 까닭이다. 늦은 나이에 군대에 간 형에게 선물한 것이었는데, 형은 추운 겨울날 탈영해서 이 시집을 낱장으로 뜯어 바닥에 깔고 야산에서 잠을 청했다고 한다.


내가 괜한 시집을 선물해서 공연히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든 건 아닌지 자책하기도 했는데, 사실 내가 이성복을 선물한 건 형을 통해 알게 된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에 대한 화답이기도 했다. 그때 나는 왠지 닮은 듯 다른 두 시집에서 삶과 죽음을 느꼈더랬다. 기형도에게서 죽음을 느꼈다면, 이성복에게서는 삶을 느꼈는데, 순전히 자의적인 해석이겠지만 나는 형에게 살아 보자고 그 시집을 선물한 것 아니었을까? 결과는 별로 좋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무튼 훗날 다시 구한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활판본이 아니었고, 같은 시어인데도 나는 예전 시집에서 접했던 아우라를 다시 느낄 수 없었다. 니체 전집도 마찬가지였다. 청하출판사에서 콧수염 기른 니체의 얼굴을 떡하니 박아 넣은 표지로 내놓은 활판 인쇄본들을 볼 때마다 나는 설렜고, 이 미치광이 철학자와 사랑에 빠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후 출간된 그 어떤 니체 번역본도 내게 그런 설렘을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다 보니, 이제는 남아 있는 활판 인쇄본들을 결단코 버리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혹 아내가 버리자고 해도 이렇게 말할 작정이다. “나는 활판 인쇄본을 갖고 있고 싶어. 죽을 때까지 다시 읽지 않는다 해도 말이지.”


# 2 _ 책이라는 물건, 삶에 대한 기억


이 소심한 고백 뒤로 문득 드는 생각은 내게 책이라는 것이 어떤 사실, 정보, 이야기를 전달해 주는 수단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건 딱지, 뽑기, LP판과 같은 물건으로서의 추억이자 그 물건과 함께 뒹굴었던 삶에 대한 기억이라는 얘기다.


기억을 더듬어 가다 보면, 사실 예전에는 책이 참 귀했다. 유네스코가 책의 날을 지정한 1995년보다도 한참 더 전, 그러니까 내가 유소년기를 보내던 1980년대 이전 시절 일이다. 귀하다는 게 책방이 없다거나 책을 구경하는 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다. 동네마다 작은 책방은 지금보다 많았다.(대개 헌책과 새 책을 모두 취급했다.) 다만 새 책을 사서 볼 여력이 그리 없었다는 뜻이다. 참고서도 손위 형제에게 물려받아 쓰던 시절이니, 소일거리로 책을 사 볼 엄두를 내기는 어려웠다. 닳고 닳은 책을 이웃끼리, 친구끼리 돌려 보거나 그리 크지도 않은 학교 도서실(도서관이 아니라 교실 하나를 비워 몇 안 되는 책들을 기증받아 비치해 놓은 도서실)의 해진 책들을 빌려 읽곤 했던 것이다.


당시 아이들에게(적어도 내게) 책은 귀한 놀이 중의 하나이자, 다른 놀이를 촉발하는 매개체 같은 것이었다. ‘괴도 루팡’(요즘은 뤼팽이라고 하지만)에 푹 빠져 있었을 때는 그 이야기 구조를 거의 외우다시피 하며 머릿속에 상상의 나래를 펼쳤고, 더 나아가서는 탐정·수사 놀이에 빠져 친구들과 공사장을 돌아다니며 일종의 역할극 비슷한 것을 했더랬다.(공사장이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위험천만한 곳인데, 은폐·엄폐물이 많아 우리에게는 환상적인 놀이터였다.) 어디 그뿐이랴. 귀하디 귀한 동식물도감이라도 본 날에는 뒷동산에 올라 생물학자 비슷한 흉내를 냈고, 강과 바다를 주제로 한 책을 읽은 날 하필 비라도 올라치면 학교 운동장에 나가 물길을 내겠다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곤 했다. 그러니 책은 내게 몸의 기억이기도 하다.


그 몸의 기억 때문일까? 오랜 세월 책은 내게 애틋함을 주는 대상이었다. 책방에서 나는 종이 냄새, 책장을 넘길 때 손끝에 전해져 오는 질감, 활자들과 그 활자들 사이의 행간이 가져다주는 묘한 시각적 쾌감 같은 것들은 단순히 문자 정보를 흡수한다는 실용적인 이점 이상의 것을 가져다주었다. 게다가 가끔 읽던 책을 펼쳐 둔 채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에 잠기다 보면 어쩐지 책이라는 녀석 그 자체와 삶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 때가 있었다.


내겐 그런 시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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