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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목제 Sep 19. 2023

헛울음을 안는다,

슬픔은 슬퍼하지 않고, 눈물은 눈물 흘리지 않으니,

할머니의 삼일장 내내 어머니는 곡을 했다. 그때는 그래야만 했다. 부모를 잃은 상주는 울어야만 했다. 화장터까지 계속된 곡으로 어머니는 진이 다 빠져 보였지만, 관혼상제 의례를 대단히 중요시했던 큰아버지는 어머니 뒤편에 버티고 선 채 계속해서 곡을 주문했다. “곡해!” 열여섯 어린 나는 그게 참 못마땅해서 속으로 큰아버지를 욕했다. ‘개새끼.’ 삼일장 내내 아버지의 모습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려운 형편에, 당시로서는 흔치 않게, 장모와 함께 산 일이 칭찬받아 마땅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살가운 사위가 아니었다. 모두들 장모를 ‘모시고’ 산 착한 사위를 칭찬했지만, 사실 그이가 장모를 모시고 살았다기보다, 할머니가 우리 가족을 보살펴주었다는 것이 맞는 말이었다. 살림과 세 아이 양육에 서툰 딸아이를 대신해, 할머니는 온갖 궂은 살림을 도맡아 해 주었고, 아버지를 위한 저녁 밥상에는 늘 따뜻한 밥과 할머니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맛난 국이나 찌개가 오르곤 했다. 그건 국물을 좋아하는 사위를 위한 밥상이었다. 할머니의 국물 요리는 정말 맛있었다. 난 그이의 고추장 두부찌개 맛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어머니가 진이 빠질 정도로 울음을 터뜨리는데, 슬픈 마음이 들기는커녕 눈물 한 방울 나지 않는 내가 당황스러웠다. 할머니의 관이 화장터로 출발하기 위해 집 밖으로 나설 적에, 온통 울음바다가 된 어른들 사이에서 아무 감정이 들지 않는 나 자신의 모습에 죄책감을 느끼며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슬픔이 절정에 달한 발인날 아침의 뒤숭숭한 분위기 탓에 아무것도 먹지 못한 나는 그저 배가 고팠다. 화장터 불가마에서 나온 하얀 할머니의 뼈가 잘게 부수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내내 어머니는 계속 곡을 했고, 나는 계속 배가 고팠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의식이 끝난 뒤, 삼악산 기슭에서 먹은 육개장, 난 그게 너무 맛있어서,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싹싹 훑어 먹었더랬다. 생각해 보니, 할머니의 육개장도 참 맛있었다. 특별한 일이 있어야 먹을 수 있었던 육개장, 난 이제껏 할머니가 끓여주었던 육개장보다 맛난 육개장을 먹어본 적이 없다.


모든 장례 절차가 끝난 이후 며칠 동안, 더 이상 할머니와 함께 잠자리에 들 일 없는 빈 방에는 난생처음 보는 까만색 벌레들이 기어 다녔다. 아마도, 죽은 할머니가 누워 있던, 나무로 된 관과 함께 딸려 온 벌레들일 터였다. 벌레들을 볼 때마다 관이 생각났지만, 여전히 슬픔이 밀려들지 않았고, 여전히 눈물은 나지 않았다. 상실에 따른 눈물의 기억이 별로 없다는 걸, 지금에야 알게 된다. 그건, 형이 죽었을 때에도, 어머니가 눈을 감았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형의 사망선고를 듣고, 이를 형수에게 알렸을 때, 중환자실 앞에 당도한 그이가 오열을 하며 주저앉을 때, 난 그저 물끄러미 그 광경을 바라보며 다음 장례 절차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장자의 사망 소식을 아버지에게 알렸을 때, 그이는 “뭬야?” 하는, 기계적이고 연극적인 고함을 질렀고, 난 장례식이 끝나면 다시 연락드리겠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안 된 말이지만, 난 슬프지 않았고, 형이 결국 술 때문에 죽게 되리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음을,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눈물, 같은 건 차오르지조차 않았다. 그날 나는 형을 상실했을까. 어쩌면, 이미 오래전, 나는 형을 상실했고, 누이를 상실했고, 어미를 상실했고, 아비를 상실한 사람이었다. 할머니. 난, 살아생전 단 한순간도 그이를 마음 깊이 사랑하지 않았다. 난, 그저 그이가 차려준 따뜻한 밥을 먹어치우는, 그이가 마련한 따뜻한 솜이불에 몸을 구겨 넣는, 어리석은 짐승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니, 할머니의 경우, 난 그이를 상실할 수조차 없었다. 눈물이 나지 않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눈물이라는 것도, 결국 전기신호에 따른 화학적 반응에 불과하며, 전기신호도, 눈물도 우주의 기본 입자로부터 조합되고, 언젠가는 마침내 기본 입자로 돌아가게 될 원자일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상실에 따른 마땅한 슬픔을 느끼지 못하고, 상실에 따른 당연한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한 비루한 존재를 생각하다 보면, 무언가 잘못되어 버린 것인가, 곱씹어보게 된다. 만약 정상과 비정상, 일반과 비일반을 굳이 구분해야 한다면,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상태는 아닐지도 모르겠으나, 또 생각해 보면, 우주가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우주의 존재로부터 비롯된 지구라는 특이한 행성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특이한 행성에 출현해 생을 생으로 이어가는 인간이라는 괴이한 존재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일들은 아니니, 눈물 따위, 나오지 않아도, 상식과 비상식을 운운할 필요는 없겠다 싶기도 하다.


할머니가 우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 없다. 할머니 눈에 조금이라도 눈물이 맺히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 없다. 가족인 것 같지만, 실은 가족도 아닌, 우리들에게 눈물을 보인 적 없다 해서, 그이의 가슴속에 슬픔이 고여 있지 않았다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어머니의 눈물은 언제나 서러움이었다. 어머니는 별것 아닌 일에도 서러움이 북받치면 눈물부터 흘리는 사람이었다. 어머니의 경우, 그런 눈물은 상대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 실은, 그 서러움이 실제로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그건 그저, 오래된 결핍감과 부재감에서 오는 서러움이었고, 그 결핍감과 부재감은 그 누구도 채워줄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랑이라는 허상으로부터 비롯된 새로운 가족이 그 구멍을 메워줄 수 있었을까. 난 그렇지 않았다고 믿는다.


막 죽은, 아직 따뜻한 어머니의 얼굴을 어루만질 때에도, 몇 시간 만에 차갑게 식어버린 어머니의 얼굴을 쓰다듬을 때에도, 하얀 뼛가루가 된 어머니를 바라볼 때에도, 결국 눈물이 나지 않았지만, 왜 눈물조차 나지 않는지, 왜 가슴속에 슬픔이 밀려들지 않는지, 내게 묻지 않았다. 우물 깊은 곳에 아무리 커다란 웅덩이가 있더라도, 마중물이 없으면 길어 올릴 수 없는 법이다. 또한 설령 마중물이 있다 해도, 이미 망가져버린 펌프는, 이미 저 깊은 곳에서 잠들어버린 물은, 서로 연결되지 못한 채 죽어갈 것이다. 오래전, 국민학교 운동장 한구석에 있던, 우물과 녹슨 펌프가 생각난다. 우리는, 이미 수돗물이 개통된 운동장 한쪽에 방치되어 있던 그 우물에서, 마중물을 부어 가며, 어렵사리 물을 길어 올리는 놀이를 하곤 했다. 그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녹슨 수동 펌프는 삐그덕거리며 말을 듣지 않았고, 아이들이 연신 양동이에 수돗물을 받아 와 마중물을 부어도, 우물 깊은 곳, 어둔 밑바닥의 물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돌멩이를 던져 넣으면, 한참 후 풍덩 소리를 내는 걸 보니, 분명 저 아래 깊은 곳에 무언가 있는 것이 분명했음에도, 그 깊은 눈물은 세상 밖으로 흘러나오려 하지 않았다. 누군가 죽을 때, 그 사건이 촉발한 에너지가, 돌멩이가, 내 존재 깊은 곳 우물에도 파문을 일으킬지 모른다. 하지만, 그 파문은 끝내 지상 위로 길어 올려지지 못할 것이고, 녹슨 펌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를 보며 눈물 흘리는 나를 볼 때, 드라마를 보며 눈물 흘리는 나를 볼 때, 난 그것이 오래된 상실과 슬픔에서 비롯된 눈물이라기보다, 그저 내 존재의 헛울음같이 느껴지곤 했다. 그건 한밤중, 깊은 어둠을 뚫고, 차디찬 바람이 우물을 휘감을 때, 녹슨 펌프와 심연과도 같은 구멍과 캄캄한 웅덩이가 공명하며 내는, 스산하고 처연한, 우웅, 우우웅, 우우우웅, 낮은 비명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것은 마중물을 끌어안고 저 깊은 곳에서 단숨에 솟아오른 우물물이 아니라, 허깨비 같은 헛울음이다. 그럼에도, 난 언제나, 헛울음을 울고 싶어 했다. 같은 드라마를 보고 또 보며, 슬픈 장면을 보고 또 보며, 헛울음을 울고 싶어 했다. 이제 와 돌이켜보니, 내 삶에 누더기처럼 붙어 있는 눈물들은, 대부분, 헛울음이었으니, 내 존재의 우물에서 길어 올려진 진짜 우물물은 단 한 방울도 없었으니, 나의 부재감은, 나의 슬픔은 그저 허깨비였는지도 모른다. 정말인가. 그대가 곧 슬픔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물이 되지 못해, 기껏 슬픔이 되어버렸을 뿐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래요, 제가 곧 슬픔이지요. 그러니 나의 슬픔은 그저 허깨비일 밖에요. 슬픔이 슬퍼하는 것을 본 적 있나요. 눈물이 눈물 흘리는 것을 본 적 있나요.


한때 내 원가족을 사랑한 적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다만, 실체 없는 그이들을 그리워한 적은 있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그리움을 삼키며, 무작정 사진첩을 뒤적이곤 했다. 거기, 삶의 이야기를 결코 정확히 대변해주지 않는, 찰나의 이미지들이 담겨 있었고, 난 눈앞에 있는 가족이 아니라, 실체 없는 이미지들에서 가족을 찾고 있었다. 무의미한 짓이었다. 가끔은, 내 기억이, 사실에 대한 기억이라기보다, 사진첩 안의 이미지들을 재조합하고 재구성한 기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가 끝내 붙잡고 있었던 것은 허상이었다. 가족이라는 허상. 그걸 놓아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단 한 번도 놓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난 언제나, 부재하는 존재를 그리워했던 거다. 그건 지독한 자기모순이었다. 부재하는 존재라는 자기모순에 매달려, 존재하는 부재감을 놓아주지 못했던 게다.


내일은, 또, 비가 온단다. 그러니, 울지 않아도 좋다. 눈물 따위, 빗방울보다 못한 눈물 따위, 실은 빗방울과 다르지 않은 눈물 따위, 흘리지 않아도 좋다. 언젠가, 원자로 해체되어, 빗방울이 되어, 쏟아져 내릴 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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