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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Bs Nov 26. 2019

[OB'sDiary] 빚


나는 늘 자신감도 넘치고 자존감도 강한 사람이었다. 숱하게 많은 자존감을 높이기 위한 책들이 베스트셀러에 몇 년째 오르내리고 있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내가 처음으로 나 자신을 지키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 간절해 '나는 뻔뻔하게 살기로 했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같은 책을 사들였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큰 도움이 되진 않았다. 내가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들이 조금 다른 단어로 쓰여 있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읽고 싶은 문장이 적혀 있는 페이지를 읽고 또 읽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주한 내 자존감의 바닥을 딛고 얼른 다시 일어서고 싶었다.


그때는 내가 나름대로의 신념을 가지고 해온 모든 일들을 부정 당하고 내가 좋은 뜻으로 베푼 호의를 의심 당했던 때였다. 얼핏 보면 논리정연하게 쓰인 것 같은 글 뒤에 숨은 폭력적인 오해와 무시가 며칠 내내 나를 못살게 굴었다. 억울했지만 내가 가진 책임감 때문에 나도 똑같은 폭력으로 맞설 수 없었다. 그저 밥 먹는 것도 잊은 채, 나는 논리가 없는 공격을 당했지만 논리가 완벽한 반박을 준비해야만 했다. 그게 그때의 내 이름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그때 아무 것도 몰랐던 엄마는 볼살이 쏙 빠진 날 보며 살이 빠졌다며 좋아했다.)


그러나 그때부터 시작된 오해는 점차 폭언과 멸시가 되어갔다. 내가 어떤 일을 어떻게 하든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한 부분에 대해 질책 받았고, 가끔은 면전에서 대놓고 비웃는 소리까지 들어야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해명할 가치조차 없는 일이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참고 또 참을 수밖에. 그러다 이렇게는 못 버티겠다 싶을 때는 또다시 논리가 완벽하고 빈틈이 없는 반박으로 나 자신을 지켜야 했다. 그 과정에서 또 감정적 에너지, 시간, 관계를 소모해야만 했지만 그들과 나의 다른 입장과 책임감 때문에, 내가 지키고 싶은 내 이름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잘못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아니, 있다. 관계가 개입된 이상 모든 일은 0대 100일 수는 없다. 다만 나는 1을 했는데 10 만큼의 질책을 받는 것, 내가 저지른 1의 실수를 스스로 인정하고 만회할 방법을 찾기도 전에 1000의 멸시를 당하는 일은 내 생각보다 나를 더 빨리 갉아먹었고, 어느덧 '사실은 내가 1000만큼 잘못한 게' 맞는 건 아닌지 스스로 고민하게 만들었다. 내가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존재라는 걸 마주하는 게 힘든 것이 아니라, 알고 보니 내 모든 언행이 부주의고 잘못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나를 가장 힘들게 했다.


그럼에도 다행히 나에겐, 아직은 전부 무너지지 않은 나의 단단한 부분과 그런 나를 어릴 때부터 믿고 지켜봐와준 끈끈한 친구들이 있어서 나를 모두 잃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앞으로도 내가 1의 실수를 저지르면 1000으로 돌아올 조롱과 폭력이 두렵다. 어쩌면 오랜 시간 동안 되찾아주지 않으면 다시 찾기 힘들 정도로 많은 부분을 떼어낸 건지도 모른다. 괜찮아진 것 같아도 그저 그 시간이 나를 지나갔을 뿐, 나는 그 시간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마주해야 했던 사람들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되는 적은 사람들을 겪으며 느낀 내 감정들을 감히 그들의 것과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감히, 그들은 내 두려움보다 만 배는 큰 두려움과, 내 억울함보다는 만 배는 답답했던 억울함 같은 걸 늘 껴안고 있었을 것 같다는 짐작을 해본다. 내가 어떤 일을 하든 의도를 무시 당하고 결과를 조롱 당하는 날들이 일상이 되는 건 무시무시한 일이다. 내가 나를 잃어버렸던 것과는 비교도 안되게 커다란 상실이 삶을 잠식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헤아릴 수는 없지만, 내가 손으로 셀 수 있는 나날 동안 나를 바닥에서 일어설 수 없게 한 무거운 돌덩이를, 셀 수 없는 나날 동안 수천수만개는 짊어져야 했을 그 인생이 이제는 부디 편안해졌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무심했던 내가 보내지 못했던 응원만으로도 나는 당신들에게 빚을 진 것 같아서, 뒤늦은 마음을 전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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