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walk, How to work
마트? 없다. 슈퍼? 없다. 편의점?? 당연히 있을 리가 없다. 원구마을 반경 2km 안에는 식자재를 살 수 있는 곳이 없다. 간단한 것들은 도보, 자전거를 이용해 가까운 영해면 내에서 수급하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아 자차 보유자의 힘을 빌려 장을 보러 나갈 때가 많다. 그야말로 ‘날을 잡고’ 생필품을 구비해야 하기에, 평범하던 일상 속의 이벤트 하나도 이곳에서는 더없이 특별해진다. 손에 꼽으며 기다릴 만큼. 이러한 측면에서 바라봤을 때, 동네 주민분께서 심어 주고 가신 대파가 그렇게 소중할 수 없다.
뚜벅이마을의 베이스캠프는 독채 3동, 그리고 사무업무와 식당을 겸하는 컨테이너 2채로 구성되어 있다. 개량한옥 스타일의 독채는 꽤 아늑하다. 아늑하다고 표현했지만, 사실 5명이 한 개의 동을 사용하기에는 공간이 매우 좁은 것이 사실이다. 자연스럽게 우리의 주된 생활공간은 독채로 둘러싸인 앞마당이 된다.
식사는 웬만하면 같이하는 편이다. 독채 내부의 작은 화구에 질린 나머지, 모르타르를 구매하여 화덕을 만들어버리는 추진력은 무엇…. 걷기를 좋아하는 우리지만 가끔은 이렇게 급발진을 하기도 한다. 이것 또한 우리의 속도인 걸 어쩌겠는가! 그 정도의 결단력과 실행력은 있기에 이렇게 먼 시골까지 내려와 청춘을 걸어보는 것일 테다.
화덕의 연료가 장작이라면, 우리의 연료는 젊음의 열정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직접 만들어 먹는다. 요리사 출신 친구 2명의 주도하에 일사불란하게 준비되는 식사는, 하루의 피로를 싹 잊을 만큼 맛있다. 진심이다. 결국 언제, 어디서, 어떻게 등의 상황적 여건을 따지지 않고 우리는 기어이 굶지 않고 산다. 심지어 잘. 이 정도면 ‘잘 먹고 잘 살자’라는 목표 하나에는 매우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 듯하다.
개(犬)로 말할 것 같으면, 약 3만 년 전부터 인간의 반려동물로서 생활했다는 연구 결과가 존재할 정도로 인간과는 결코 떼 놓을 수 없는 동물이다. 뜬금없이 무슨 개(犬)소리냐고? 우리 마을에도 귀여운 개(犬) 친구가 있거든! 그 이름은 바로 꼬순이.
이 친구는 베이스캠프로부터 불과 100m 가량 떨어져 있는 어르신 댁에서 오고 가며 두 집 살이를 하는 ‘간 큰 녀석’이다. 꼬순이는 뚜벅이마을의 어엿한 일원인 만큼 걷는 것을 좋아한다. 심지어는 장거리 트레킹을 떠난 우리를 3km 넘게 따라오다가, 지친 기색이 역력해 차로 되돌려 보내진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을 정도다. 최근 (아빠 모를) 엄마가 된 우리 꼬순이. 평소 좋은 사료만 탐낸다는 이유로 자주 잔소리를 하곤 했던 나로서는, 이 친구가 엄마가 됐다는 사실이 대견하면서도 괜스레 미안한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참고로 우리 꼬순이는 연기도 한다. 뚜벅이마을 홍보 차 촬영된 영상에서 일약 (원구마을) 스타 반열에 올랐다는 사실은 안 비밀! 카메라에 불이 켜지고, 모두가 숨죽인 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꼬순이만을 바라보고 있었 을 때 꼬순이는 보란듯이 액션 스타 뺨치는 달리기 연기를 보여준 바 있다. 녹화가 끝나자 여기저기서 그를 향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꼬순이는 당당하게 바닥에 드러누워 배를 까 뒤집었다. 귀한 몸이니만큼 고양이들한테 사료 삥뜯기지 말고 부디 오래오래 건강했으면 좋겠다.
걸음을 위한, 걸음에 의한, 뚜벅이의 마을인 ‘뚜벅이마을’에서 원시인들은 오늘도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멀리 영덕까지 가서 맞이하는 ‘잉여 시간’이 따분하지는 않냐는 주변의 질문이 많기에, 우리의 주말 일상을 간단하게나마 소개해 보려 한다.
이곳에는 MBTI라는 기준 아래 ‘E’ 로 분류되는 성향의 사람들이 주를 이루기 때문일까. 주말이라고 해서 다들 가만히 쉬는 법이 잘 없는 편이다. 바닷가에서 해수욕을 즐기는 청년, 면이나 읍에 위치한 카페에서 독서를 하는 청년, 그나마 가까운 대도시인 포항에 나가 영화와 같은 문화생활을 즐기는 청년들도 있다. 로컬의 여가라고 해서 사실상 타 도시 청년들의 그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고 말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누릴 수 있는 것들은 생각보다 많다.
이처럼 즐길 거리가 다양한 영덕이지만, 그중에서도 블루로드 트레킹만은 오직 이곳에서 향유할 수 있는 특별한 활동에 해당한다. ‘시골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면 모를까, ‘도시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니.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낯설게 느껴질 이 행위가 우리에겐 소소한 취미라는 사실이 어쩐지 조금은 뿌듯하기도 하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예쁜 트레킹 코스인 블루로드가 우리 베이스캠프 근처에 자리하고 있다. 64.6km에 달하는 코스를 하루만에 완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에, 우리는 코스를 나누어 주말마다 걷곤 한다. 사실 완주가 무슨 의미가 있으랴. 걷는 행위 자체가 좋은 걸. 참고로 말해 두자면 과정에 가치를 두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만서도, 정작 필자 본인은 64.6km의 블루로드를 약 8번 정도 완주했다. 마치 트레킹에 중독된 것처럼. 블루로드는 그 자연경관 때문이라도 걸어볼 가치가 충분한 곳이기에 걷고 또 걸어도 질리는 법이 없다. 이러다 블루로드 홍보대사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하는 동안에도 다음 트레킹을 기다리고 있다. 꽃이 피면 꽃이 피는 대로, 눈이 오면 눈이 쌓이는 대로 각기 다른 풍경을 자랑하는 블루로드의 매력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속에 영덕의 사계절을 그려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21세기 원시인들은 차가 없어서 걸어다니는 게 아니다. 단지 걷는 게 좋아서 걸을 뿐. 무언가의 대안으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 대상 자체의 매력을 느끼며 살고 싶다. 물론 본인은 자차가 없긴 하지만.
4km/h, 걸음의 속도로 사는 삶.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