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을 삼키고, 하루를 넘긴다.
나는 약빨을 잘 받는 사람이다. 이제는 아침, 저녁으로 약을 꾸준히 먹는 사람이 되었다. 매일 일어나고, 자기 전 자동으로 손이 약봉지를 찾는다. 한때는 커피 타임이 하루의 리듬이었다면 이제는 약 타임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처음 약을 먹던 며칠은 속이 조금 메스꺼웠다. 의사는 나에게 맞는 약을 찾을 때까지 속이 조금은 불편할 수 있다고 하였다. 속이 불편한 걸 보니 약의 기운이 돌기 시작한 거 같다.
약을 꾸준히 먹고 2주쯤이 지나자 조금씩 마음의 파도가 잦아들었다. 불안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예전처럼 나를 삼켜버리진 않았다. 퇴근길 자동차 안에서 오늘 누가 했던 '아무 말'을 곱씹던 내가 이제는 그냥 음악을 듣는다. 별일 아닌 일에 심장이 쿵쿵대던 날들이 조금은 덜해졌다. '괜찮아졌다'는 말이 꼭 행복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날의 나는 확실히 덜 힘들었다.
하루는 문득 약봉지를 꺼내 효능을 읽어봤다. '망상 및 환각 증상 억제' 그 문장을 보는 순간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망상이라니. 나는 단지 생각이 많은 사람일 뿐인데. 밤에 잠들기 전에도, 아침에 눈을 떠서도 '그 말의 의미가 뭐였을까', '혹시 내가 실수한 건 아닐까' 끝없이 반복되는 생각의 회전목마 속에서 나는 늘 살아왔다. 불안장애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했다. 하지만 막상 '망상 억제제'라는 단어를 보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복잡했다. 그 단어가 주는 느낌이 너무 거창해서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인 건가 싶었다. 한편으로는 웃기기도 했다. '망상 억제 중인 사람' 마치 영화 속 캐릭터처럼 들리지 않나.
그런데, 이상하게 편했다. 그동안 나를 괴롭히던 생각들이 이제 이름을 얻었다는 게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망상'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덕에 내 생각을 조금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름이 생기면 감정은 덜 두렵다. 불안이 불안이라는 이름을 얻었듯 생각에도 망상이라는 이름이 생기니 내가 겪는 일들이 조금은 덜 혼란스러워졌다.
약을 먹는다는 건 나를 바꾸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다시 숨 쉴 수 있게 도와주는 일이라는 걸 요즘은 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꽤 오래 걸렸다. 이제는 물 한 잔에 약을 삼키는 일이 그저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어쩌면 나는 약을 통해 나를 돌보는 법을 배우는 중일지도 모른다. 불안을 억누르는 게 아니라 그 불안을 잠시 눕혀두는 법을. 약의 힘이든 내 의지든 그게 뭐든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나는 여전히 살아있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불안은 아직 내 곁에 있지만 이제는 나를 지탱하는 힘 중 하나가 되었다. 그게 약의 진짜 효능 아닐까.
“상처는 빛이 들어오는 자리이이다.” – 루미